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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6. 2020

이부스키에서 검은 모래찜질을

여행도 인생도 예측할 수 없는 것


'꿈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십 년도 전에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개중엔 아직 시작도 못한 일이 있는가 하면 과연 이룰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적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어느새 이뤄낸 것들도 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무슨 티브이 프로그램인가에서 일본의 작은 어촌마을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래 위로 얼굴만 점찍어 놓은 것처럼 나란히 내놓고 쪼르륵 누워 모래찜질을 하는 광경을 보고는 나도 언젠가는 저걸 꼭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곤 나의 꿈의 목록에 적어두었더랬다.


'이부스키에서 검은 모래찜질하기'


어느 해 가을 우리 가족은 일본 큐슈지방을 기차로 여행했다. 후쿠오카(福岡)나 가고시마(鹿児島)와 같은,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도시뿐 아니라 처음 가보는 소도시들까지도 고루 일정에 넣었다.


남큐슈의 미야자키(宮崎)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날, 나의 꿈의 목록에서 하나를 더 지울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선로에 문제가 발생해 우리가 타기로 되어있던 증기기관차가 갑자기 운행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특정 시간, 특정 루트만 운행하는 증기기관차인지라 일본의 지인까지 동원해 예약하고 간 참이었는데 그걸 못 타게 되어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행도 인생도
어찌 계획대로만 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플랜 A만큼이나 흥미로운 플랜 B를 뚝딱 만들어 내는, 그리고 내가 이부스키(指宿)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울낭군 덕분에 북쪽으로 향하던 우리들은 방향을 급선회해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큐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바닷가에 있는 이부스키로!




이부스키는 오랫동안 관광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휴양지이지만 소도시의 소박함을 유지하고 있어 더욱 마음에 었다. 이곳은 지열을 이용한 천연 모래찜질로 유명해 바닷가에는 얼굴을 제외한 온몸을 모래 속에 파묻고 찜질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햇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얼굴 부분은 작은 무지갯빛 양산으로 가리고 있는데 얼굴 하나에 양산 하나씩이 짝지어 꽂혀 있는 모습이 일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우리도 모래찜질과 사우나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구매한 후 유카타로 갈아 입고는 해변으로 향했다. 바닥에 누우니 직원이 삽으로 모래를 푹푹 떠 몸 위에 끼얹는다. 잠시, 산 채로 매장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긴장되기도 했지만 온몸에 퍼지는 따스함을 느끼며 탁 트인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섬뜩한 생각은 어느덧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찜질은 15분만 하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곳에 누운 사람 중 그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다. 나도 그랬다. 이거하러 이 먼 이부스키까지 왔는데 적어도 20분은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누워있었다. 그렇게 20분을 넘어 30분이 흐르고 나서야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모래에서 빠져나왔다.



찍어달라고도 안했는데 카메라 어디 있냐고 묻더니 알아서 찍어주는 센스, 이부스키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갓 36개월이었던 여행이도 엄마, 아빠와 함께 검은 모래찜질을 즐겼다. 아이니까 답답하지 않게 허리까지만 모래로 덮고 시간도 짧게. 어른들이 하는 걸 자기도 함께 한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던지 모래 속에서 얌전히도 잘 누워있던 우리 여행이. 더웠는지 곧 탈출을 감행해 기승전 모래놀이 삼매경으로 모래찜질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듯
내 꿈의 목록 또한
때때로 내용이 더해지고 빠지며
변화를 거듭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으로 언제 다시 마음껏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요즘 같은 시절을 내 꿈의 여행지 목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할애해 볼 작정이다.


-2017년 9월, 일본 가고시마 이부스키-


◇ 여행팁 ◇

● 큐슈 최남단에 자리한 가고시마현. 그곳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이부스키(指宿)는 지열을 이용한 검은모래찜질로 유명한 곳이다. 가고시마현의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에서 기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이기에 가고시마에서 출발하는 당일치기 여행지로도 추천할만하다. 이부스키 역에서부터 차로 약 5분, 걸어서 약 20분이 소요되는 바닷가에 검은모래찜질을 할 수 있는 온센들이 모여 있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가도 마치 동네 목욕탕에 가듯 현장에서 표를 구매한 후 이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래찜질을 한 후 온천 사우나까지 이용할 경우 금액이 약간 추가된다.

● 스나무시 온천회관 사라쿠(砂むし会館 砂楽)
주소: 5-25-18, Yunohama, Ibusuki-shi, Kagoshima, 891-0406, Japan
운영시간: 8:30-21:00(입장 마감 20:30)
입장료: 모래 찜질 및 온천 사우나 1,080엔(13세 이상), 590엔(12세 이하)/ 온천 사우나만 이용 시: 610엔(13세 이상), 300엔(12세 이하) 
웹페이지: http://sa-raku.sakura.ne.jp/en/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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