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

두렵다고 물러서지 않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by 여행하는가족

여행아, 안녕? 엄마야.


어제저녁에 너는 아빠가 좋아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려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다면서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어.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그리기 쉽지 않은 캐릭터였는데 너는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까지 몇 번이고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더니 결국에는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더라. 네가 이제껏 그래왔듯, 두렵다고 물러서지 않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8살의 네가 그려서 아빠에게 선물한 그림


너는 겁 없는 아이는 아니었어. 아니, 오히려 겁이 많은 축에 속했지. 새로운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향해 바로 달려들기보다는 조심스레 그 대상에 다가간 후 오랜 시간을 들여 살펴보았고 그러고 난 이후에야 행동을 하는 아이였단다.


미끄럼틀 타는 거 좋아하지? 그런데 혹시 알고 있니? 네가 그걸 혼자서 타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처음에는 미끄럼틀 근처에 서서 그걸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만 봤어. 너무나도 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 눈에도 보이길래 엄마가 잡아줄 테니 한 번 타볼까라고 물어도 넌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저으며 구경만 하더라. 그렇게 며칠 동안이나 눈으로만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던 네가 드디어 용기를 냈던 날, 나는 드디어 네가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되나 싶었어. 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용기는 생겼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용기까지는 없었나 봐. 그래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통통하고 귀여운 팔을 양쪽으로 쫙 펼치고 있는 너를 내가 두 손으로 안다시피 해서 미끄럼틀 맨 아래로까지 이동시켜 줬어. 이렇게 타는 것도 아니요 안 타는 것도 아닌 방법으로 즐기기를 며칠, 어느덧 너는 한 손으로만 내 손을 잡은 채 미끄럼을 탈 수 있게 되었지. 이후로도 또 여러 날이 흘렀어. 이제 너는 엄마의 새끼손가락 하나만을 잡은 채 미끄럼틀을 탈 수 있게 되었는데 타면 탈수록 네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으로 보건대 어느새 네가 새로운 재미에 적응을 하게 된 것 같더라.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혼자서도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 미끄럼틀 꼭대기로 가더니 다음 순간 슝-. 그 이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다른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볼래?


지금보다 어릴 적에 너는 갑작스럽게 커다란 소리가 나는 상황을 아주 무서워했어. 예를 들면 공중화장실 핸드 드라이어의 웅~ 하는 소리라든지 엄마가 집에서 사용하던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소리 같은 것 말이야. 같은 이유에서인지 청소기 소리도 무척이나 무서워해서 청소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울음을 터뜨리거나 후다닥 도망가 숨기도 했단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너의 그림에 청소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어. 참 이상한 일이었지. 너는 자동차나 기차, 중장비와 같은 탈 것들을 좋아해서 그 무렵 너의 스케치북은 언제나 도로를 달리는 바퀴 달린 것들로 가득 차 있었거든. 그런데 좋아하지도 않는 청소기라니.


(좌) 네가 24개월에 그린 파란색 청소기 (우) 네가 30개월에 그린 청소기. 주변의 점과 동그라미는 쓰레기라고 네가 알려줬단다


이런 일도 있었어. 휴가를 떠났다가 네가 해파리에 쏘이는 사건이 일어났어. 해변과 가까운 얕은 바다, 그러니까 해파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모두들 너무나도 놀란 데다 그때 생긴 흉터가 자그마치 일 년이나 지난 후에야 사라진 터라 엄마, 아빠에게는 잊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야. 그날 이후 엄마는 좋아하던 해파리냉채까지 싫어졌단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놀랐던 것은 상처를 입은 네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사건 이후 너의 스케치북에 어떤 생물이 등장했는지 아니? 맞아. 바로 해파리야! 네가 갑자기 해파리들을 그리기 시작한 거야.


해파리 사건 이후 네 스케치북에는 해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어. 32개월의 네가 그린 해파리들.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며 우린 함께 그림을 그렸어. 파란색, 빨간색 크레파스로 그린 게 너의 그림이야. 아무래도 너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파도와 해님과 해파리였나 봐


청소기도 그렇고 해파리도 그렇고 엄마는 네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왜 자꾸만 그림으로 그리는 것일까 궁금했어. 떠올리기도 싫을 텐데 왜 자꾸 걔네들을 그리는 걸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싫어하는 것을 스케치북에 옮기는 과정이 어쩌면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너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실제로도 네가 청소기랑 해파리를 잔뜩 그리고 난 이후에 너는 청소기의 큰 소리에도 태연해졌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지나가던 수족관 해파리 수조에도 바짝 다가가 한참 동안 그것들이 꿈꾸듯 유영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지.


엄마가 이 편지 앞부분에 쓴 말 기억하니? 너는 두렵다고 물러서지 않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 너는 미끄럼틀과 청소기와 해파리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면서 두려움을 극복해 낸 사람이고, 도저히 그릴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려낸 사람이야.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바로 너야.


이 글을 읽고 있을 미래의 여행아. 지금까지의 네 삶에도 어려운 순간과 두려운 순간이 있었을 테지. 하지만 엄마는 네가 그 모든 시간들을 극복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읽고 있을 것이라 확신해.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어쩌면 앞으로의 네 삶 속에도 어려움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그렇지만 이제껏 그래왔듯 너는 그 문제들도 잘 헤쳐나갈 거야. 왜냐하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를 지닌 사람이니까.


힘이 드는 날 이 편지가 네 안에 있는 용기를 깨우길 바라며

2023년 3월 23일 용기 있는 너를 존경하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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