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몰랐는데 헤어지고 나니 비로소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더라."
이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소가 그러하고 환경이 그러하고 사물 또한 그러하다.
두바이에 온 이래,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이 있다. 아, 물론, 가족들도 그립고 친구들도 그립고 심지어 반가울 때보다 귀찮을 때가 더 많았던 빗방울마저도 그립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그리운 것은 바로 돼지고기였다. 아, 서두부터 너무 본능에 충실했나?
돼지의 맛
나는 육식을 즐긴다. 남의 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살은 돼지의 살. 돼지고기 애호가에게 한국은 천국이었다. 집 앞 정육점에만 가도 먹음직스럽게 진열된 돼지고기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는 언제고 마음이 동하면 신발을 대충 꿰신고 달려 나가 기름진 돼지고기 한 덩이 사 들고 와서 적당히 익은 김치를 넣고 바글바글 찌개를 끓여 먹을 수가 있었다. 식당을 찾아가 숯불의 힘으로 겉은 바삭 속은 쫀득하게 잘 익혀진 돼지고기를 한 점, 아니지, 두 점 집어 들고 매콤한 고추를 곁들여 상추며 깻잎으로 야무지게 싸 먹는 기쁨도 비할 데 없었다. 간혹 간판에 오동통한 귀여운 아기 돼지들이 마이크까지 들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그림을 박아 놓은 식당 앞에서는 '저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고 나서 어떻게 먹으라고...'라는 생각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 내 입 안을 한 바퀴 돌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황홀한 돼지의 육즙에 나는 언제나처럼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두바이의 이웃이자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에 자리한 그랜드 모스크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
두바이가 속한 아랍에미리트의 국교는 이슬람교로 동네마다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Mosque)가 자리하고 있다. 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신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삶의 일부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듯 하루 다섯 번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에 맞춰 수많은 무슬림들이 모스크를 찾아 기도를 올린다. 공항이나 쇼핑몰 등 대부분의 공공장소에 기도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물론, 간혹 실내 기도실까지 이동하기 힘든 곳에서는 자그마한 개인 카펫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삼삼오오 모여든 무슬림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바이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서구의 미디어를 통해 주로 접해온 정보들이 나에게 이슬람교와 테러의 연결고리를 강화시켰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중동 지역에 살게 되면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겁부터 먹지 말고 이 미지의 종교와 그들의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신자가 아니라 기도 시간은 피해야 했지만 신앙의 중심지인 모스크에도 다녀왔고 이슬람교를 믿는 친구들에게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지역의 역사나 종교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는데, 아직까지도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여행을 앞두고 선택했던 『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고야마 시게키 지음, 박소영 옮김/ 이다미디어)는 중동 지역에서 탄생해 세계 3대 종교가 된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 무어냐고? 그것은 바로, 천주교 신자인 내가 절을 찾아가 불공을 드리는 친구와 우정을 맺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바치며 매 주말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는 친구와도 둘도 없이 가까이 지내듯이 아잔 소리에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이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무슬림들도 그냥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아잔(Adhan): 무에찐(Muezzin)으로 선택된 이가 무슬림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방송. 미나렛(Minaret)이라 불리는 모스크에 붙은 탑에서 하루 다섯 번 울려 퍼진다.
두바이 어느 동네에서든 이슬람교 사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부분이 미나렛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것
“너희에게 허락되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잡은 고기가 아닌 것, 목을 졸라 죽인 것과 때려서 잡은 것과 떨어져서 죽은 것과 서로 싸워서 죽은 것과 다른 야생이 일부를 먹어버린 나머지와 우상에 제물로 바쳤던 것과 화살에 점성을 걸고 잡은 것이거늘 이것들은 불결한 것이라.”
- 코란 제5장 수라트 알마이다에서 발췌-
두바이에는 현지인뿐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들도 많아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무슬림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친하게 교류하는 친구와 나의아이들끼리도 친한 사이여서 우리는 그 애들이 함께 놀 기회를 종종 만들어 주곤 한다. 어느 날은 친구가 꼬마 둘 모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놀게 하고 저녁을 먹이고 샤워까지 시켜 놓으면 내가 잠 잘 준비를 끝낸 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은 내가 반대로 아이들을 맡는 식이다.
망아지 같은 아이 둘이 우리 집에서 오후 내내 놀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는 게 바로 지금을 의미하는 것일까?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지 두 명의 작은 사나이들은 한시도 엉덩이를 한 자리에 붙여놓질 못했고 그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금세 또 배가 고파지는지 몇 번이고 간식을 찾았다. 그날따라 준비해 놓은 것들이 더 일찍 동이 났는데 아이가 나에게 배가 고프니 짜파게티를 끓여 달라 했다. 마침 집에 짜파게티도 있겠다, 아이의 친구도 면요리를 좋아한다고 했겠다, 그래서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봉지를 뜯었다. 태어나서 처음 그 ‘요리’를 맛본다는 아이의 친구는 까만 면을 돌돌 말아 한 입 먹어보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고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요리의 이름이 뭐죠!?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순식간에 짜장면 한 그릇을 흔적도 없이 먹어버린 아이의 친구는 면을 조금 더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날 저녁, 아이들도 행복하고 엄마인 나도 뿌듯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낮에 우리 집에 아들을 맡겼던 친구였다.
“유미, 오늘 유미가 만들어 줬다는 면요리가 어떤 거야? 우리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였다면서 또 먹고 싶다고 해서. 이름 좀 알려 줄 수 있을까?”
침대에 누워 흐뭇하게 문자를 바라보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맛있었겠지. 돼지고기가 들어갔으니 맛없을 수가 없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설마… 설마… 내가 무슬림 아이에게 돼지고기를 먹인 것은 아니겠지? 그것도 온 가족이 열심히 기도하고 매년 라마단까지 꼬박꼬박 챙기는 가족의 아이에게 돼지고기 기름 맛을 보게 해 준 건 아니었겠지?
맹세코 일부러 먹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짜파게티를 끓여 달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꺼내 더 맛있게 만들어 주겠다며 완두콩이랑 올리브기름까지 더 넣어 대접한 나 스스로의 무지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실망스러웠다. 침실에서부터 부엌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1초라도 빨리 짜파게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부엌에 영원히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라면 상자에서 짜파게티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늘이 도우사!! 거기에는 할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한국에서 사 온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짜파게티가 아니라, 두바이의 한국 슈퍼에서 파는 중동 수출용 짜파게티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다 감사 기도를 올리고픈 마음!
*할랄(halal):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의미. 이슬람교의 율법에 따라 도축된 고기, 준비된 음식으로 무슬림들이 먹어도 되는 식품을 뜻한다.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
얼마 전, 내 아이는 우리 집에서 할랄 짜파게티를 맛있게 먹었던 친구의 집에 또 놀러 갔다. 하굣길에서부터 아이들을 직접 픽업해 그날 오후 내내 나를 자유부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친구를 위해 나는 작은 선물을 사 들고 갔다. 그날의 선물은 짜파게티. 물론, 할랄식품이고 뒷면에 조리 방법이 아랍어로도 적혀 있기에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친구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너도 한 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다음에 놀러 올 때 더 많이 사다 줄게.”
친구에게 할랄 짜파게티가 든 종이가방을 건네며 나는 얼마나 당당했던가.
한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지난겨울 오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벨이 울린 적이 있었다.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주문한 물건도 없는데 누구지?라고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머리에 히잡을 두른 그 친구가 수줍게 웃으며 서 있었다.
“너는 천주교 신자니까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메리 크리스마스!”
그녀가 건넨 가방에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반짝이는 초와 함께 나의 아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식기세트가 들어있었다.
그리워질 두바이에서의 시간
두바이 이전에도 유럽과 북미에서 각각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낯선 곳에서의 경험 하나하나는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두바이에서의 시간은 조금 더 특별하다. 아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더 멀고, 더 두렵게만 느껴지던 이 문화권에서의 3년은 나를 전보다 조금 더 넓게 보고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비교적 열린 자세를 지니고 있는 두바이에서, 나는 자유롭게 나의 종교생활을 하고 타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알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먹던 돼지고기의 맛이 가끔씩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운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이곳에서도 대부분의 큰 슈퍼마켓에는 넌무슬림코너(non-muslim)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돼지고기를 판다. 그리고 두바이에서 먹는 돼지고기의 맛이 마음에 안 든다면 선택할만한 다른 옵션도 사실 많기는 하다. 그런데 내가 익숙하지 않다고 두려워하고 외면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지금 두바이에서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낯선 공간과 종교와 문화와 음식들, 이 모든 것들은 지금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이토록 만끽할 수 있을까.
두바이에는 이슬람교 이외의 다른 종료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는 종교단지가 따로 있어 누구든 자신의 종교를 지켜갈 수가 있다. 사진 속 장소는 두바이의 천주교 성당 내부
무슬림 친구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래 내내 우리 집 거실 한편에 놓여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두바이를 떠난 이후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물 흘리지 않도록 지금, 내 앞에 두바이가 선사하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대하며 살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