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Dec 08. 2023

네 분의 선생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는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눈을 뜬 지는 벌써 세 시간이 되어간다. 잠이 부족하면 다가올 오늘 하루가 힘겨울 것이 분명해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아 포기하고 그냥 누워있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내가 다시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오늘이 바로 여행이가 두바이에서 다니던 학교에 마지막으로 등교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코 짧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삼 년은 마치 찰나처럼 짧은 시간이었다. 2021년 2월 첫째 주, 제 몸에 비해 큰 교복을 입고 까만 새 구두를 신고 상반신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학교 책가방을 메고 힘없이 첫 등교를 했던 아이는 이제 몇 시간 후면 같은 길을 마지막으로 지나 학교에 가게 될 것이다. 처음 와보는 나라의 낯선 학교, 아는 이 하나 없고 언어마저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의 여행이는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 주었고 이제는 익숙해진 두바이와 학교를 떠나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다.


학창 시절은 한 사람의 전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삼십 년이 넘었지만 친구들과 뛰어놀던 운동장의 풍경이라든지 우리 반 창가에 나란히 줄지어 서 있던 크고 작은 화분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시간이 갈수록 추억 속 화면은 흐릿해진대도 그 시절이 남긴 정서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의 경우, 한국에서는 취학통지서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바이로 떠나와야 했었기에 취학면제 신청을 하고 왔다. 그리고는 두바이에 오자마자 바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니 초등 과정 정규교육을 이곳에서 시작한 셈이다. 이 도시에서 보낸 아이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고마운 얼굴들이 많이 떠오른다. 편견 없이 아이를 두 손 벌려 맞이해 준 순진하고 씩씩한 여행이의 친구들, 학부모 사이로 만났지만 이제는 나에게도 친구가 된 엄마, 아빠들, 그리고 선생님들. 두바이에서의 마지막 등교를 앞두고 이제껏 여행이의 반을 맡아주셨던 네 분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간단히 기록하고 싶다. 나중에 해야지라고 생각했다가 혹여 고마운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1) 1학년(1SDE)의 Sarah Debono 선생님

등교 첫날,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내가 급하게 알려준 Hi, Bye, Thank you, Toilet 정도가 전부였다. 갑작스레 해외로 나갈 계획이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가 모국어를 완전히 습득한 이후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는 여행이에게 영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귀와 입은 있으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두바이의 영국계 국제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행이의 등교 첫 주 마지막 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혹시 여행이에게 언어 장애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일 주일 동안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입학을 하면서 아이가 영어를 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는 했었지만 선생님도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지는 모르셨던 게 분명했다. 나로부터 더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Sarah 선생님께서는 자신도 여행이와 꼭 같은 나이에 몰타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래서 그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이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셔서 결국 나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여행이가 입학한 학교에는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영어교육 과정이 없다. 재학생 대부분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거나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영어라는 언어에 이미 익숙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Sarah 선생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눈 바로 다음 주부터 여행이를 삼십 분씩 일찍 학교에 등교시켜 달라고 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파닉스(Phonics 단어가 가진 소리, 발음을 배우는 것) 교육을 따로 시켜주시겠다는 거였다. 다행히 여행이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따랐고 놀라운 속도로 파닉스를 떼더니 더듬더듬 영어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반 아이들 전체를 이끄시느라 분주한 상황에서도 여행이를 위해서만 따로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영어를 한국어로 바꿔 의사소통을 시도해 주시고, 화장실이 급한 상황처럼 긴급한 상황 수십 개를 그림으로 그려 넣은 판을 만들어 오셔서 아이가 필요할 때 해당되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그에 맞게 처리를 해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여행이의 초등학교 첫 담임선생님이셨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선생님 덕분에 아이가 낯선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기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절대 잊지 못할, 아니, 절대 잊으며 안 되는 고마운 분이다.


(2) 2학년(2EMU)의 Emma Murdie 선생님

Emma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환하게 웃는 아름다운 미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멀리에서 봐도 햇살처럼 밝은 얼굴 덕분에 주변을 밝게 만들어 주는 사람, 그게 바로 Emma 선생님이셨다. 감사하게도 여행이는 1학년에서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단짝 친구들도 사귀게 되어 학교 생활에 적응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학년이 되면서 반이 완전히 다 바뀌는 바람에 늘 붙어 다니던 아이들이 모두 다른 반이 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Emma 선생님의 자애로운 지도 덕분에 새 반, 새 친구들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2학년이면 아직 많이 어린 나이인지라 Emma 선생님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분의 반에서 지냈던 것은 아이의 정서를 편안하게 가꾸는 데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는 다른 학년을 맡고 계시지만 학교에서 오며 가며 만날 때마다 여전히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활짝 핀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여행이와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묻고 꼭 자기 반에 놀러 오라는 말을 덧붙이시는 고운 선생님이다.


(3) 3학년(3BTR)의 Bobbie Trotter 선생님

Bobbie 선생님은 1학년과 2학년 담임 선생님에 비해 엄한 편이셔서 아이들이 처음에는 조금 무서워하기도 했던 분이셨다. 하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강단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분이라 마음에 들었고 여행이의 이전 담임 선생님에 비해 엄하게 공부 습관을 잡아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여행이는 언어 습득력이 좋은 편이고 책 읽는 것도 아주 좋아해서 영어도 비교적 빨리 배웠다. 2학년 때까지는 영어보다는 숫자만을 다루는 수학 수업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3학년때부터는 영어 과목에서도 큰 발전을 이뤘는데 이 부분에서 Bobbie 선생님의 도움과 격려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영어 읽기나 글쓰기에서는 영국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여행이가 학교에서 쓴 동화책을 읽고는 너무 놀라서 영어 총괄 선생님께 보여드리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에 눈물 많은 엄마는 또 감동의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었다. 말 한마디 못하던 아이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다.


(4) 4학년(4ASH)의 Anita Sharkey 선생님

아랍에미리트의 학교는 1년 3학기제로 운영되고 1학기는 매년 9월 초에 시작되어 12월 초에 끝을 맺는다. 현재 4학년인 여행이는 1학기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비록 한 학기 동안이었지만 Anita 선생님 덕분에 아이가 두바이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제는 선생님께서 얼마 전에 다녀온 스쿨트립에서 찍은 반 단체 사진을 인화하고 그 뒤에 메시지를 적어 전해주셨다. 사진 속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이 사랑스러웠고 그것을 따로 준비해 아이에게 전해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Bobbie 선생님과 Anita 선생님은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여행이가 지닌 능력을 활용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셔서 그 또한 감사했다.


선생님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또는 두바이에서 꼭 다시 한번 뵐 날을 고대합니다.


2021년 2월, 첫 등교를 했던 주의 여행이


2023년 11월, 반 친구들과 Dubai Safari Park 소풍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살아간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