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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움 Dec 09. 2022

그냥 쭉 아무 데나 발길 닿는 곳으로,

런던 야경 이야기 1

10월에 영국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친구들의 영향도 있었다. 내 고등학교 친구 다윤이는 지난 4월부터 동생이 있는 영국 레스터에 머무르고 있었고, 11월 초에 다시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마침 뉴욕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은비도 10월에 잠깐 짬을 내어 영국에 놀러 온다고 하길래 나도 일정을 맞춰보기로 했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는 영국에서 여행을 같이할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매우 편하지만, 생활 방식도, 가치관도, 여행 취향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농담 삼아 자주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 만났으니 친구가 되었지, 대학생 때 머리가 크고 만났으면 절대 친구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은비도 나처럼 영국이 처음이지만, 런던에 머물지 않고 열차로 한 시간 걸리는 다윤이네 집에 나흘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있는 동안 뭐 할 것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둘은 똑같이 이야기했다.  

“그냥 집에서 맥주 마시고 넷플릭스 보고 잘 건데?”

처음 영국에 왔는데… 집에서 맥주 마시고 텔레비전 보고 쉰다고?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 친구들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게 그 친구들의 스타일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하루 날을 잡아, 런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아침부터 일찍 런던 구경을 하고, 친구들은 오후 느지막이 런던에 도착해서 내가 예약해둔 애프터눈 티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참 먹고 떠들다 애프터눈 티 집에서 나오니 저녁 8시였다. 벌써 런던의 시내는 어두컴컴해진 지 오래고, 차가운 런던의 가을바람이 매섭게 뺨을 때렸다.


어디로 가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역시 그녀들은 그냥 쭉 아무 데나 발길 닿는 곳으로 걸어가 보자고 했다. 저녁이든 낮이든 사람이 북적북적하는 피커딜리 서커스를 지나는 동안, 다윤이는 몰래 나의 사진 20장을 남겼다. 사진 속에는 혹시나 소매치기를 당할까 봐, 혹시나 친구들을 놓칠까 봐 긴장하고 있는 나의 표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전에 티를 마실 때,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내가 그나마 용기 내어 낮에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못난이처럼 나와 다시는 사진 찍기 싫다며 농담처럼 늘어놓았던 푸념을 기억하고는 말이다.  

“이소 봐봐. 내가 볼 때는 사진기사가 문제였던 것 같아. 내가 찍은 게 더 예쁘게 나왔지?”

이렇게 나의 자존감도 확 높여주는 친구들이다.


한참을 걷다가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 앞에 멈추어 섰다. 낮에 나는 미술관 투어를 갔었는데, 낮에 왔던 내셔널 갤러리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야간 조명에 비친 내셔널 갤러리, 트래펄가 광장의 넬슨 제독의 기념비와 사자상은 낮보다 더욱 아름답고, 웅장하며 늠름해 보였다. 깜깜한 거리에 드문드문 조명이 밝히는 조용한 이곳의 야경을 보니, 낮에 그 분주했던 장소가 맞나 싶었다.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 앞에 한참 동안 서서 트래펄가 광장에 오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구경했다. 전혀 불편하지 않은 침묵, 이 침묵은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일 것이다. 그 침묵을 깨고 은비가 저 멀리 가로등에 비치는 여자아이들을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애들 좀 봐. 저기 춤추는 여자애들. 쟤네 지금 이 추위에 밖에서 왜 저러냐.”

“너 생각 안 나? 너 마지막 기말고사 앞두고 답답하다며 그 새벽에 나가서 달밤에 체조했잖아. 나 그때 너 정신 나간 줄...”

“우리 12시 통금 맞춘다고 15분 동안 역에서부터 진짜 쉬지 않고 달렸던 거 기억해? 나 진짜 그날 숨통이 끊어지는 줄 알았어.”

그렇게 런던의 밤거리의 모습은 15년이 넘게 우리 마음속 어딘가 묻혀 있었던 추억들을 소환했다. 고등학교 때의 추억, 철이 없던 그 시절 그때만 가능했던 이야기들 말이다.


우리는 좀 더 걸어 웨스트민스터 역까지 걸어갔다. 그곳은 많은 관광명소가 모여 있어 유명하지만, 소매치기 등이 범죄가 많아 조심해야 하는 구역이다. 유독 그 동네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그 전에는 무서워서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음을 재촉해도 30분이 넘게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친구들이랑은 느릿느릿 걸어도 30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 8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든든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은비야 너 왜 이렇게 사진 못 찍어. 이소처럼 좀 찍어줘 봐. 이 사진 어디다 쓰냐고요.”

은비와 다윤이는 빅벤을 배경으로 서로를 찍어주며 티격태격했다.

“이소! 거기에 걸터앉아봐. 여기 뒤에 배경 멋있다.”


나는 원래 사진 찍히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런던의 밤거리에서 오랜 친구들이 찍어주는,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같이 사진을 찍는 그 시간을 즐겼다. 강 건너 핑크색 휘황찬란한 조명의 런던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우리 내년에도 하루 날 잡아서 런던에서 또 만날까?”

“런던 다 봤어. 런던에서 빅벤이랑 이거 보면 다 본 거야. 다음번에는 딴 데서 만나.”

역시 내 친구들다운 대답이다.

내년에도 만나자. 여행 중 딱 하루면 되겠어. 그게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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