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퇴근 후 지나가는 공원에 환하게 밝힌 트리와 2023이라는 조형물이 새삼 이제 곧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거리에는 캐럴이 들리지 않고 연말에도 업무가 바쁘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당장 이틀 후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15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해 이맘때쯤, 2022년은 무언가 다를 것이라고, 특별할 것이라고 믿었던 바람은 역시나 헛된 것이었을까?
어제 승진 발표가 있었다. 나는 원래 내년도 승진 대상인데, 올해 특진을 노려보자고 팀장님이 올 초 이야기했다. 워낙 진급은 어렵기도 하고, 이미 몇 번 누락한 분들도 수두룩해서 이번에 되지 않아도 괜찮다며, 내년에 원래 연차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나에게 맡겨진 업무도 잘 끝마쳤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떨어지니 괜히 누락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괜찮은데, 원래도 내년에 하면 되는데, 자꾸 사람들이 내년을 다시 바라보자며 나에게 밥이나 사주겠다고 했다. 측은하게 보며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무 생각 없던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도 몰랐던, 내가 먼저 알아야 할 내 소식을 다른 팀 사람들에게서 들으니 팀장님한테 화가 났고 자존심이 상했다.
올해는 자기 계발에 충실히 하고자 했다. 다시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올해는 자격증을 딸 계획이었고, 작년처럼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였었지만, 막상 쓸데없이 일에 치이느라 두 가지 다 손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스페인어 수강 종료 기간이 이제 고작 60일 남았다고 알람이 오는데, 수업을 들은 지는 120일도 넘은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을 그때그때 사긴 했지만, 결국 못 읽은 채 책장에 쌓여 있는 책이 열 권이 넘었다.
이제 정말 삼십 대 후반이 되어버렸고, 올해는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적인 연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을 만나 안정적인 연애를 하는 것은 애초에 어려웠던 일이었다. 그와 봄에 시작했던 연애는 초여름 힘들었고, 기나길었던 출장 귀국길에 끝나버렸다. 결론적으로 일찍 끝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둘만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연애 초기에 출장을 너무 오래 다녀와서 그렇게 끝나버린 것이라며 이별의 이유를 자기들 마음대로 단정 지었다.
코로나가 이제 진정이 되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하게 되는 야근 때문에 저녁 약속을 막판에 취소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대학 후배가 회사 앞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들만 계속 생겼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며 야근하고 죽기 살기로 일했나? 결국 올해 나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남은 걸까? 나 자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살을 베는 것 같은 추위에 집으로 향해 걸어가는 그 15분 동안 나의 머릿속은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온장고에 들어있던 캔 커피 하나를 샀다.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화려한 공원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멍 때리다 보니 올해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았음에도, 감사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올해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코로나 가운데서도 건강히 잘 버티고 계셨다. 올해 업무가 바뀌고 출장을 자주 갔는데, 그러면서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다른 나라 구경을 했고, 런던으로 휴가도 다녀왔다. 비록 특진은 하지 못했지만, 좋은 고과를 받았다. 슬작생을 비롯해 여러 모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오랫동안 함께할 좋은 친구도 만났다. 글도 꾸준히 쓸 수 있었다. 작년에는 너도나도 자퇴하겠다던 교회학교 아이들이 더 이상 속 썩이는 것 없이 학교생활을 무난하게 해내고 있었다. 스페인어 공부는 못했지만, 작년부터 듣던 상담과목을 무사히 이수했다. 올 초에는 올림픽으로, 봄, 여름, 가을은 야구로, 겨울에는 월드컵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랬다. 결혼이나 승진이나 크고 굵직굵직한 일들은 아니지만, 나름의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그렇게 다시 생각해 보니, 2022년이 썩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혹 나빴을지언정, 지나간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이 그랬던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는 나쁜 것은 금방 잊는 사람이었다. 분명 2022년 마지막 날, 2023년은 또 특별할 거라며 기대에 들떠 있을 내가 빤히 그려졌다. 다 마신 캔 커피를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승진 발표로부터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도 함께 버려버렸다. 2023년에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보면서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Background Photo by Jonathan Borb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