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공인중개사 도전기
얼마 전까지 우리 집에는 수험생이 한 명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재수생이다. 따로 방이 없어 거실에서 공부하시는 이 재수생 때문에 밤늦게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볼 수가 없었다. 엄마는 거의 13년 만에 수능생 도시락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이 재수생은 바로 환갑을 훌쩍 넘으신 우리 아빠다. 다른 분들 같으면 벌써 손주들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르실 연세이시지만, 일단 아들 딸들이 출가할 생각을 안 하니... 크흠.
작년에 아빠는 새로운 꿈이 생기셨다.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꿈을 이루기에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필요했다. 그게 여름쯤이었는데, 당시 공인중개사 시험은 4개월 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집 근처의 시험 응시 장소는 다 마감이 되어 대전으로 내려가서 시험을 봐야 했다.
아빠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우리나라 최고로 어려운 시험 중에 하나를 합격하셨다. 그것도 대학교 졸업 전에. 모두 다 아빠의 스펙을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쉽게도 그런 아빠의 두뇌를 나와 동생은 아쉽게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모두가 인정하는 똑똑한 아빠가 작년에 시험 보기 전에는 버릇처럼
"아빠 머리 이제 못 쓰겠다. 머리가 굳었나 봐. 방금 앞장에서 본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어쩌지?"라며 자신감 없어하셨다. 사실 몇 개월 만에 준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것도 회사를 다니면서는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선택해서 보기로 한 시험이었는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 보다. 시험 보기 일주일 전에는 장염에 걸리셨다. 그 몇 개월 동안 아빠는 퇴근하시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문제를 푸시다가 주무셨다. 집에서는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며 주말에 사무실에 가셔서 공부하시다가 오신 적도 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지, 볼펜도 5개 이상, 형광펜도 5개 이상을 시험 보기 전에 다 쓰셨다. 교재들은 글씨가 빽뺵히 적혀있고 너덜너덜해졌다.
그렇게 시험 날, 대전에서 시험을 보시고 집에 돌아오신 아빠는 결과에 대해 묻지 말라고 하셨다. 탈락이었다. 공부했던 게 시험을 막상 보러 가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고 하셨다. 엄마는 장난처럼 "당신 어디 가서 이번에 시험 봤다고 하지 마."라고 아빠를 놀렸다. 그리고 아빠가 괜히 스트레스받으실까 봐 절대로 그 일을 우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빠가 자존심이 상하셔서 더 이상 시험 보는 것을 포기하실 줄 알았다.
올해 봄쯤, 아빠는 교재를 한 아름 가지고 오셨다. 아빠는 본인의 문제점을 파악하셨다. 기초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핵심 요약본만 보고 문제를 풀었다고, 기본부터 다시 다져서 공부해보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올해는 틈 날 때마다 기본서부터 공부를 하셨다.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강의를 들으면서 복습하셨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게임만 하는 동생과 누워있는 내가 엄청 자극을 받을 만큼 말이다.
10월 29일 시험 날, 아빠는 작년보다는 더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집 근처 시험장으로 가셨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서 아빠가 점심으로 드실 맛있는 도시락을 싸셨다. 저녁에 아빠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시는 데, 아빠의 얼굴이 작년보다 밝았다. 가채점 결과 합격이었다.
"아빠 결과 발표날, 소고기 먹자!"
공식적으로 결과 발표가 나는 이번 말일에 가족 파티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아버지의 공인중개사 재수 생활은 끝이 났다. 무언가 목표 달성을 하신 것이 매우 오랜만이라 아버지의 기분도 즐거워 보인다.
공인중개사 시험이 끝나자마자, 아빠는 나에게 링크 하나를 카톡으로 보내셨다. 감정평가사 회계과목 기본서 구매 링크였다."나 이거 하나만 딸이 사줘."라는 메시지와 함께. 지금 내가 이 글을 쓸 동안, 아버지는 또 거실에서 내가 사드린 회계과목 기본서를 열심히 공부하고 계신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도전에는 나이가 없다. 아빠한테서 자극을 받은 나는 슬며시 200일 동안 돈만 내고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스페인어 인강 재생 버튼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