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로움 Aug 30. 2022

불만과 오만의 도시 파리

나의 유쾌하지 않은 파리 방문기

처음 간 파리 여행은 신입 사원 때였던 11년 전이었다. 사회생활 첫여름휴가라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프랑스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 한다. 하지만 나에게 파리는 불만과 오만의 도시다. 어떻게 로맨틱한 이 도시를 사랑하지 못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름 여행가인 나에게는 손에 꼽는 불쾌한 인상을 남겨준 몇 안 되는 도시이다. 이번 출장 역시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다시금 각인시켜주었다. 


이 사랑의 도시에서는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누구든 금방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로맨틱한 도시를 상상하고 꿈꾸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기대였을까? 처음 숙소가 있었던 파리 북부역의 근방의 음침한 거리에서 노숙자들이 나타났다. 나와 내 친구에게 무어라 하면서 다가오는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종종걸음으로 골목 사이사이를 누벼 숙소를 찾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 파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7월 중순쯤 갔는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로맨틱한 바토 무슈를 타고 센강을 유람할 때도, 남들은 파리의 야경을 만끽할 때 나는 추위에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찾아들어 온 온기에 잠이 들어버렸다. 어리바리한 아시아 언니들을 구워삶아 한탕해보려는 집시 아이들의 지나친 친절에 정신 뺏기지 않으려 신경을 바짝 곤두서는 바람에 저 멀리 노을에 걸쳐진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의 아름다움에 맘껏 취하지도 못했다. 정말 일생에 한 번은 꼭 보고 싶었던 모나리자는 나보다 훨씬 큰 서양 관광객들에 둘러싸여 있어 내가 꿈꾸던 대로 우아하게 감상하지 못했다. 파리 여행의 절정은 마지막 날이었다.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서 샤를 드골 공항으로 떠나려고 할 때, 그 지하철 플랫폼에는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저 멀리 혼잣말하는 노숙인,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는 흑인이 있었다. 빨리 지하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저 멀리 어디선가 여자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리자 그 소리에 흥분이 되셨는지 갑자기 흑인 아저씨는 내 옆 앉아 혼자만의 즐거움을 만끽하셨고, 우리는 지하철이 오자마자 무섭게 그 자리를 피했다. 그게 십여 년 전 나의 파리 여행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파리의 모습은 다를까? 사실 이번 파리 여행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출장 일정을 마치고, 파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로 환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영국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원래 예정된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유럽 전 지역에서 한국으로 가는 모든 비행기가 만석이라, 이틀 후에나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많은 짐들을 부친 상황이었고, 우리 일행에게는 노트북과 핸드백이 전부였다. 에어프랑스에서는 세면도구 키트를 주었고, 공항 근처 호텔을 예약해주었다. 여벌에 속옷과 옷이 없는 상태에서 이틀간 파리에 더 있는 것은 패닉이었다.

하지만 진짜 패닉은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일단 우리를 담당한 호텔 리셉션 직원은 흑인 아저씨였는데, 우리 뒤에 있던 백인 여성들에게는 “Hi, Beautiful ladies”라고 친절하게 말을 건네면서 우리에게는 구걸하러 온 노숙인처럼 대했다. 비행기가 연착된 것을 우리 잘못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불쾌함을 안고 방을 배정받았는데, 내 방에만 샤워가운이 없어 하나 달라고 이야기하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내가 지금 노는 것처럼 보여? 하우스키핑은 다 퇴근했다고! 왜 나에게 말하는 거야. 항공사에서 너희에게 특혜를 줬으면 줬지, 우리가 왜 너에게 특혜를 줘야 해?”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야. 내 방에만 없어서 물어보는 거야. 그냥 Yes인지 no인지만 대답해줘.”

그는 No라고 말했고, 나는 알겠다고 하고 방으로 다시 올라왔다. 비행기가 연착이 되어 우리가 지금 이 불편한 밤을 보내는 게 어떻게 항공사가 우리에게 준 특혜인가? 옷이 없는 불편함, 차별을 받은 불편함, 불친절을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편함,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이 불편한 밤이었다. 


그 다음날 나와 일행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에펠탑을 보면서 한 끼라도 맛있게 먹다가 즐기다 가자는 생각에 잠시 파리 시내로 나갔다. 저 멀리 붉게 지는 태양을 배경으로 센 강을 지나는 바토 무슈, 그리고 에펠탑을 한참 바라보았다. 역시 파리는 파리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시내로 나간 김에, 프랑스 전통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 달팽이 요리, 푸아그라 등 이것저것 맛있게 먹었다. 꼬질꼬질한 나의 모습이 싫어서 예쁜 원피스 하나도 구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제 나의 기억 속 10여 년 전 파리의 모습은 그날의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으로 덧칠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 기억 속에서 재탄생할 것이라고.


그러나 역시는 역시였다. 파리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 보니 노트북을 포함한 나의 짐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방 어디에도 없었다. 리셉션에 따져 물으니, 나보고 소리치지 말라고 한다. 난 소리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누가 자기 물건이 없어졌는데 가만히 있을까? 노트북은 자기네들이 다행히도 LOST AND FOUND에 넣어 놓아서 찾았다고 하지만, 내 책과 그 없는 짐들 속에 있던 티셔츠와 화장품 샘플 오롯이 다 버려버렸다. 일행과 나는 함께 있었는데, 내 방만 체크아웃인 줄 알고 치웠다는 말이 어이가 없었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제 나를 응대했던 흑인 아저씨가 깔깔 웃으면서 지나갔다. 어제 내가 샤워 가운이 없다고 달라고 해서였던 것인가? 이건 분명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What are you laughing at? You racist!”라는 말이 나왔다. 그가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다음 날, 나는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으면 본사에 클레임을 걸 것이라고 그 흑인 아저씨에게 이야기했다. 전날과는 전환된 태세로 대신 미안하다며, 하우스 키핑과 알아보고 호텔 차원의 사과를 하겠다고 이메일을 적어가던 그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연락이 없다. 오만한 사람들, 그리고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기억들로 역시 나는 앞으로도 당분간 파리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글을 쓰며 그때의 기억이 생각이 난 김에, 혹시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지나 않을까 미뤄두었던 클레임 메일과 구글 평점을 써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펠탑, 센강, 그리고 바토 무슈의 이 풍경은 너무 예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