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이로움 Jul 01. 2022

이제는 여름

빚을 청산하고 우리 가족은,

몇 주 전, 오랜만에 만난 직장 후배와 밥을 먹었다.

“선배, 선배는 부동산으로 재미 좀 보셨어요? 어디 샀어요?”

“저 내 집 없어요. 아직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중이에요.”

 “아, 내가 잘 못 물어봤네.  선배는 외국에 한 채 구입한 거죠?!”

그의 농담에 할 말이 없어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냥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여사원이 회사 안에서의 나의 이미지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입사 후 4년 정도까지는 말이다.


입사 후 4년 정도까지는 월급을 받으면 적금도 넣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기도 하고, 여름휴가는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는 잘 벌고 잘 쓰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가족들과 알게 모르게 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 빚을 만회하기 위해 가족들 몰래 했던 투자의 실패 등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본업을 놓으신 지 꽤 되었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셔서 자리를 잡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환갑이 거의 다 된 나이에 다시 일하시기에는 쉽지 않았다. 돌아보니 우리 집에서 수입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29살이 되어서야 나는 철이 들었다. 자동차를 팔고, 그 돈으로 동생의 마지막 학년 대학 등록금을 대신 냈다. 회사원인 내 이름으로 신용 대출받아 아버지의 급한 빚도 갚았다. 물론 그 대출의 대출 이자 상환은 지금까지도 나의 몫이 되었고, 나는 내 명의의 부동산은커녕, 결혼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우리 집은 어두웠다.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하셨다. 동생은   형편 때문에 대학생활 동안 친구들이랑 외식한  손에 꼽았다고 했다. 나는 한두  술을 마시고 아빠는 어떻게  지경이 되도록 놔뒀냐며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아빠 덕분에 이렇게 풍요롭게 살았는데, 조금 실패했다고 해서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자신이 싫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위성도시에 재건축을 앞둔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끝 동, 맨 위층에 끝 집에 살았다. 이곳에서 나와 동생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쭉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해 질 녘까지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놀고 있으면, 엄마가 12층에서 “소연아! 집에 얼른 와!”라고 부를 만큼 다니던 초등학교와 가까웠다. 이 집에서 생일날이면 친구들을 불러서 생일파티를 열었고, 수학여행을 간다고 장기자랑 연습을 했고, 수행평가를 한다고 친구들과 공부를 핑계 삼아 새벽녘까지 놀기도 했다. 이곳에서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고, 오래 기다리던 회사에 합격했다는 소식 역시 들었다.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우리와 함께하셨던 곳이기도 하며, 결혼을 생각했던 친구를 부모님께 인사시키기도 했던 곳, 소소하게 가족들끼리 모여 아버지 환갑잔치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와 동생이 살면서 많은 추억을 쌓은 집이지만,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수 없어 팔기로 했다. 그리고 옆 동에 월세로 이사를 했다. 남들은 벌써 손주도 보는데, 서른이 넘은 두 자녀는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산다고 핀잔을 주시면서도, 내심 집 안에 돈을 버는 자녀 둘이 아직 함께 있어 고마워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나와 동생은 다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시렸다.


그렇게 정들었던 집을, 그것도 곧 재개발로 대박이 날 것이라는 집을 팔고 월세로 이사를 오면서 빚을 다 청산했다. 처음에는 월세로 들어온 이 집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냥 이 집이 우리 집의 실패를 고스란히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이 살지 않고 세를 주던 집이니 곳곳이 방치되어 있었고, 벽지나 등도 교체하지 않아서 매우 어두웠다. 이전에 살던 집이 하늘에 가까운 층이었다면, 지금 집은 땅에 가까운 층이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온 날,  어두운 분위기가 싫어서, 이 지긋지긋한 집이 싫어서,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내가 감당해야 되는 이자나 대출은 없으니까 가족 생각 말고, 내 앞 길 먼저 생각하자는,  빨리 남들처럼 부동산으로 자산을 불려야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앞섰다.


이사하는 날, 엄마는 이제 빚을 청산했으니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월세로 남의 집에 산다고 해서, 기죽지 말자고 했다.  우리는 이전 세입자처럼 어둡게 살지 말자고, 방치하며 살지 말자고 했다. 넷이서 힘을 모으면, 금방 다시 우리는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 말을 들으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쓸고, 닦았고 변화를 주었다. 내 방에 새로운 빨간 서랍장도 들이고, 그림도 붙였다. 이 집에 나도 슬슬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대로 새롭게 삶을 시작했다. 이전 집에서는 돈 이야기만 나오면 한숨 소리만 가득했던 우리 가족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면 푸른 나무들이 내 눈높이에 서 있고, 아침에는 나무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뜬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뭇잎도 빗소리도 새롭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솔직히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지만, 지금은 가족들과 시작할 새로운 시작이 기대된다.   


이 월세 아파트에 이사 온 뒤, 몇 년을 겨울에 머물렀던 우리 가족에게도 화창한 여름이 오고 있다.


Photo by Krzysztof Kotkowicz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평생의 숙제, 다이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