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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4. 2023

길 위에서 얻은 행복

제주 걷기 여행 | 하영올레 3코스

하영올레 3코스는 시내를 벗어나 북쪽 서홍동 지장샘까지 올라간다. 물소리와 새소리, 거리의 소음이 적당히 섞인 길은 걷기에 부담이 없다. 덕분에 발걸음도 여유가 넘친다. 천지연 폭포를 이루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역 주민들도 알음알음 찾는 명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일까.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풍경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숨어 있다.   


천지연 폭포를 이루는 솜반천

솜반천은 서귀포의 명소인 천지연 폭포를 이루는 원류이다. 옛 문헌에는 홍로천, 연외천으로 표기되었으며, 과거에 선반내 또는 솜반내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솜반천으로 통일해 부른다. 지난 번 걸었던 1코스는 솜반천을 따라 천지연으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3코스는 물길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간다. 

 

천변 산책로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앙상블을 이룬 이중주 무대다. 여울진 냇물이 돌돌거리고 새들이 지저귀며 장단을 맞춘다. 귀만 호강할 수 있나. 커다란 잎사귀를 늘어뜨린 나무들과 푸릇한 숲길은 눈을 호강을 시키기 충분하다. 물가에는 상록수들이 검은 물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고, 파초처럼 펼쳐진 야자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춤을 춰댄다. 어디선가 본 남국의 휴양지와 닮았다.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목조 다리 건너편에 있는 솜반천 공원에 들렀다. 알록달록한 꽃밭에  솜반천이라 쓰인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너머에 맑은 물이 흐르는 천연 물놀이장이 있다. 물 높이가 얕은 데다 자잘한 조약돌이 깔려 있어 여름에는 사람들이 꽤나 북적여댔을 것이다. 지금은 백로 한 마리만이 한가로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    

  


상생과 공존을 이룬 소나무길

다시 올레길에 합류해 걷기 시작한다. 상록수가 울창한 산책로에는 물가에 벤치도 놓여 있다. 요즘 유행하는 물멍하기 좋은 장소다. 여유롭게 경치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도 좋으련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곁눈질로 슬쩍 바라만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우람한 소나무들이 늘어선 흙담소나무길로 접어들었다. 100년도 더 된 유서 깊은 소나무 군락지이다. 옛적에 둑 모양의 흙담을 쌓고 거기에 소나무들을 심어 마을에 모이는 화기를 막았다고 한다. 흙길을 밟을 때마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나무마다 작은 덩굴들이 기둥을 휘감듯이 타고 오르고 있는데 하나인 듯, 둘인 독특한 모습이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려울 것 없다고, 서로 조금씩 내어주고 함께 부대껴 살아가면 된다고 오래된 고목들이 나지막이 속삭인다. 


돌담 너머로는 수확을 앞둔 귤나무들로 가득하다. 옛적 제주의 대표적인 경관을 모은 영주십경(瀛洲十景) 중 하나로 귤림추색(橘林秋色)이 꼽히는데 가을이 지났어도 아직 주렁주렁 매달린 귤들이 금빛처럼 빛난다. 이맘때면 서귀포의 마을은 어디든 노랗게 익은 귤로 풍성하게 채워진다. 돌담 바깥으로 가지가 넘어왔다고 마음대로 열매를 딸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여나 올레길을 걷다 귤밭을 지나게 되더라도 눈으로만 감상하기를 권한다.      


변시지 화백과의 짧은 만남

한적한 마을을 지나 길을 하나 건너면 서홍 생태공원이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잘 꾸며져 있지만 여기선 변시지 그림정원을 보아야 한다. 변시지 화백은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로 황톳빛과 먹색으로 표현한 ‘제주화’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정립했다. 생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2점이 10년간 상설 전시되기도 했다. 그림정원에는 새를 그리고 있는 변시지 화백 동상과 그림 몇 점이 바위에 그려져 있어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작품 세계를 음미할 수 있다. 

그림정원을 나서면 담벼락에 그려진 소소한 벽화들이 눈길을 끈다. 그저 그런 벽화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니 마을 명승지들을 차례로 소개해 놓았다. 좀 전에 지나온 흙담솔 군락지도 보이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는 홍로현 현사에 대한 설명도 있다. 올레길에 있는 지장샘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어서 가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끊임없이 솟는 샘물과 거대한 녹나무

지장샘은 서홍동 마을에 솟는 용천수이다. 상수도가 개설되기 전 제주도는 용천수를 통해 식수를 해결해온 만큼 생명수나 다름없는 물이다. 물론 지금은 집집마다 모두 수돗물을 사용하면서 용천수를 이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마을 유산으로 보호하는 곳이 많다. 

지혜롭게 감추었다는 뜻을 갖고 있는 지장샘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제주에 인재가 태어난다는 풍문에 수맥을 차단하기 위한 호종단을 보냈으나 한 농부의 기지로 샘을 감추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후로도 샘물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 마을이 번성했다고 하니 ‘물’이란 것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닫는다. 샘물이 항상 일정하게 솟기에 마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마라. 지장샘물만큼만 살라’는 말이 자자손손 전해진다고 한다.  


샘물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인 면형의집 앞뜰에 자라고 있는 녹나무이다. 수령이 250년이나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녹나무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16m를 훌쩍 넘는 노거수는 나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여전히 젋고 푸르다. 나무 뒤로 보이는 건물이 오히려 작아 보일 정도다. 나무둥치에는 두껍게 낀 이끼와 덩굴들이 뒤엉켜 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언제나 상생과 공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올레길에 숨은 절경동홍천 이음길

하영올레는 코스마다 이색 구간이 있는데 3코스에도 동홍천 이음길을 만들어 놓았다. 무심결에 내려다본 다래 아래 풍경이 가히 비경이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폭포를 이룬 물줄기와 옥빛을 머금은 찰랑대는 소, 주변을 둘러싼 짙푸른 녹음이 한 폭 그림처럼 와닿았다. 아직도 이런 숨은 풍경이 있다니, 제주가 품은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 

이음길을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천연 풀장이 펼쳐진다. 폭포 아래 웅덩이는 수심이 꽤 깊어 그늘진 다리 아래에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을 따로 마련해둔 모양이다. 한여름에 이만한 피서지도 없을 것 같다. 물소리만 듣고 있어도 가슴이 시원해지고 힐링이 되는 숨은 명소다. 맑디맑은 물은 시내를 거쳐 해안까지 흘러내려가 바닷물과 합쳐진다. 정방폭포의 원류가 바로 이곳 동홍천이다. 

이색 구간을 벗어나면 천변을 따라 내려오는 힐링길이다. 처음 길을 나섰던 서귀포시청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영올레길을 마무리 할 시간, 길 위에서 얻은 많은 ‘행복’들이 마음을 꽉 채운다.     

 


하영올레 3코스 : 7.5km / 약 3시간

서귀포시청 제1청사 – 솜반천 탐방로 – 흙담 소나무길 – 변시지 그림정원 – 지장샘 – 면형의집 – 동홍천 이음길 – 산지물 물놀이장 – 동홍천 힐링길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2년 10월 호에 연재된 기사입니다.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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