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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4. 2023

물길 따라 서귀포 원도심 여행

제주 걷기 여행 | 하영올레 2코스

하영올레 2코스는 정방폭포 물길을 따라 정모시쉼터와 서복전시관을 거쳐 서귀포 해안까지 이어진다. 국경을 넘나든 옛 역사와 문화예술의 흔적을 좇고, 시장에서 맛깔난 주전부리들을 즐기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2코스도 서귀포시청 제1청사에서 출발하지만 대로변에서 1코스와 반대 방향인 성산 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정방폭포 물길이 이어진 비밀의 숲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시아CGI애니메이션 센터에 닿았다. 아시아CGI애니메이션 센터는 국내외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글로벌 거점 센터다. 1층에 애니카페가 있어 잠깐 둘러볼까 했던 것이 십여 분이 넘도록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책 한 권 빼들고 후루룩 책장을 넘겨가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이러고 있다간 올레길을 완주하기 힘들겠다 싶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참새방앗간이라 눈 딱 감고 지나쳐 가지 않으면 그대로 눌러앉기 십상이다.

학교와 직장으로 사람들을 떠나보낸 한낮의 거리는 한산하다. 태평근린공원을 지나 길 하나를 건너면 도심 사찰인 무량정사이다. 절 건물 너머로 우뚝 솟은 아파트가 이질적인 느낌이다. 올레길이 이어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니 무성한 수풀 쪽에 분홍빛 화살표가 눈에 띄었다. 정방폭포 물길을 따라가는 이색 구간이다.

‘저런 곳에 길이?’ 반신반의하며 풀숲에 발을 들이자마자 삽시간에 깊은 숲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오솔길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풀이 많이 자랐다. 걷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어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에 들어선 지 7~8분 남짓 되었을까. 시냇물처럼 잔잔하던 물살이 폭이 넓어지고 수심도 깊어졌다.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더니 풀숲에 둘러싸인 천연 물놀이장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귀포를 수십 번은 발걸음 했어도 정모시쉼터는 처음 와보는 곳이다. 하영올레를 통해 숨은 명소를 발견한 듯해 걷는 보람마저 느껴졌다. 푸른 숲에 흐르는 맑은 물과 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 반짝이는 햇살이 어우러진 풍경이 예쁜 그림책을 펼쳐놓은 것 같다. 마음은 이미 물속에 뛰어들었으나 현실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내년 여름에 꼭 다시 오리라, 다짐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서복도 감탄한 서귀포 으뜸 비경

냇물을 따라 내려간 곳에 서복불로초공원이 있었다.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 중국풍 공원에 맥문동과 삼백초, 어성초, 방풍 등 토종 약용작물들이 심어져 있다. 맞은편에는 서복전시관이 자리한다. 공원과 전시관 사이에 작은 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밑을 흘러간 거센 물이 곧바로 바다로 떨어진다. 도심을 흘러 온 물길이 정방폭포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포를 보려면 올레길을 잠시 벗어나야 한다. 그래 봤자 200m 남짓한 짧은 거리다. 줄곧 함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폭포가 되어 넓은 바다로 나가는 마지막도 기쁜 마음으로 봐줘야 하지 않겠는가. 서복전시관에 가기 전 정방폭포를 먼저 들렀다. 

수십 미터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언제 봐도 웅장하고 아름답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폭포수가 실은 작은 냇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엄청난 굉음이 귓가를 울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물보라도 신비하게 비친다. 그냥 지나쳐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장관이다. 

먼 옛적 중국 진시황 시대 사람인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동남동녀 500명과 한라산을 찾아왔다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不過之)라는 문구를 새겼다는 설화가 내려오는데 서불과지는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이다. 정방폭포 인근에 세워진 서복전시관은 이러한 전설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중국의 정·재계 인사들이 제주도에 오면 한 번씩 방문하는 한중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전시는 가볍게 둘러볼 정도지만 야외 정원과 너른 바다가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게 한다. 정원 한편에 있는 불로장생 체험관에서 주말마다 족훈욕 체험을 운영한다니 빼놓지 말자.    

 

해안 비경에 깃든 아픈 역사

서복전시관을 나선 길은 칠십리 음식특화거리로 이어진다. 식당들이 늘어선 거리 왼쪽에 4.3유적지 소낭머리(소남머리)라 쓰인 바윗돌 이정표가 서 있다. 지형이 소머리처럼 생긴 데다 소나무가 많다고 해 소낭머리라 불렸다는 설이 전해진다. 사실 이름보다 중요한 건 광복 이후 벌어진 뼈아픈 역사다. 제주도에 깊은 상처를 남긴 4.3사건의 흔적이 이곳에도 배어 있다. 당시 토벌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던 주민 대부분이 여기서 집단 학살되었는데 해안 절벽 아래에 시신이 쌓여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 이처럼 잔혹한 광기의 시간이 서려 있다니, 결코 되풀이되어선 안 될 역사이다. 과거의 과오를 깨끗이 씻어내려는 듯 파도가 바위 절벽을 끊임없이 쓸고 닦는다. 

소남머리부터 서귀포항까지는 반짝이는 윤슬이 뒤덮인 바다와 나란히 걷는 길이다. 소남머리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예술 작품과 바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구리해안은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게와 아이들> 작품에서 모티브를 딴 정미진 작가의 작품은 방문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기 포토존이다.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꽉 막혔던 가슴을 트이는 기분이다. 배들이 가득한 서귀포항은 항구 특유의 활기가 느껴지는데 국내 최고의 미항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하지 않다.    

  

예술과 먹거리에 빠지는 골목 

서귀포항 끄트머리에서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심 쪽으로 방향을 튼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작은 할망당에서 소원도 빌고, 나무 그늘 아래서 동네 고양이와 노닥거리는 여유를 부려보았다. 솔동산 문화의거리를 지나 이중섭거리로 접어드니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련된 카페와 소품 숍들이 늘어선 거리는 관광지 느낌을 물씬 풍긴다. 

이중섭 화가는 잘 알려진 것처럼 6.25 한국전쟁 피난 생활 중 1년 정도를 가족들과 함께 서귀포에서 보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네 가족이 함께 온기를 나누며 지냈던 시간을 무척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일도 놓지 않아 많은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하면 그와 관련된 여러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있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마음을 절절히 울린다. 서귀포 피란 당시 그와 가족들이 살았던 초가집의 단칸방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 당시 힘든 피란 생활을 보여준다. 

이중섭 거리 끝에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이 마주해있다. 인근 주민들의 삶터인 동시에 여행자들 위한 먹거리 장터로 소문난 곳이다. 제철 생선과 오메기떡, 빙떡 등 제주도 별미들을 맛볼 수 있다. 전통적인 주전부리에 더해 흑돼지 초밥, 한치빵, 우도땅콩 만두 등 이색 먹거리도 한가득이다. 시장에서 서귀포시청까지 10분 정도 거리여서 하영올레 2코스는 여기서 마무리해도 좋을 듯싶다. 실컷 걷고, 보았으니 이제 출출한 배를 맛있게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영올레 2코스 : 6.4km / 약 2시간30분

서귀포시청 제1청사 – 아시아CGI애니메이션센터 – 태평근린공원 – 무량정사 – 정모시쉼터 – 서복불로초공원 – 서복전시관 – 소남머리 – 자구리해안 – 서귀포항 – 서귀진성 – 이중섭거리 – 이중섭미술관 – 서귀포매일올레시장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2년 11월 호에 연재된 기사입니다.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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