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피 Jan 30. 2021

마음 그릇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내는 소리가 아침 적막을 깬다. 서둘러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키지만, 이내 다시 몸을 누인다. 알람이 없어도 오전 여섯 시만 되면 여지없이 눈이 떠진다. 습관이란 이토록 무섭다. 직장이 한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더 이상 출근을 하느라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늦잠을 자도 된다는 것, 조금은 느리게 움직여도 된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아침에 눈을 뜨는 반복적인 행위조차 평소와 다른 움직임은 의식의 흐름을 거스른다.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는 몸에게 지금은 쉬어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침대 맡에 떠놓은 물을 한잔 들이켜고는 다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생각한다.      


  일중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을 쉬어본 적도 없다. 때가 되면 휴가를 떠나고 때가 되면 돌아와 일을 했다. 생계가 걸린 문제이니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일은 마치 아침에 눈을 뜨는 것처럼 항상 해야만 하는 일과적인 것이고, 일을 하지 않는 모습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상은 이어져야만 했다. 적어도 일상이 위협을 받을 희박한 가능성에 바이러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바쁘게 살아가던 것이 불과 이주 전의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일과 육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며 겨우 소생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일상은 꽤 오래전부터 위협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체성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체력의 문제일지도 모르나, 두 가지의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항상 버거운 일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조금이라도 치우치면 다른 한쪽이 금세 위태로워졌다.     


  타고나길 두 가지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적어도 나는 애초부터 여러 가지 일을 동시 다발적으로 하는 것엔 영 소질이 없다. 분명 뇌의 회로가 간단할 것으로 예상된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이라면 딱 질색이다. 음악을 들으며 카페에서 우아하게 컴퓨터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다른 세상 이야기이다. 현실은 음악을 들으며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는 척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주변의 소음을 모두 차단한 뒤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만 어떠한 결과물 비슷한 것을 내놓을 수 있다. 한쪽 스위치를 꺼야지 다른 쪽 스위치가 켜지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     


  엄마라는 스위치를 켜고, 일이라는 스위치는 잠시 내려둔다. 구석구석 평소에 불을 비추지 않았던 숨은 공간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니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느낀다. 계절과 세월을 역행하는 옷더미들, 다섯 개쯤은 굴러다니는 손톱깎이, 같은 크기의 프라이팬과 냄비들. 언제 쌓였는지 모를 물건들을 보니 하루에 끝내긴 글렀다. 아무래도 구역을 나누어야겠다. ‘그래, 오늘은 냉장고 너로 정했어.’     


  냉동실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비닐 덩어리를 비우며 이것은 언제 이곳에 굴러오게 된 걸까 생각한다. 겹겹이 포개진 음식들과 잘못 건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뭉치들이 마치 정돈되지 않은 내 마음속 모습과 같다. 그때그때 다가오는 감정들을 미처 소화시킬 시간도 없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만 두었더니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마음이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케케묵은 무의식의 감정들을 비워내지 않으면 오래된 냉동고 속 음식처럼 상할지도 모른다.   오랜 된 것은 비우고, 간직해야 할 것은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찾아올 수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 칼 융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무의식을 의식으로 만들기까지 당신의 삶의 방향을 이끄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에 잠재된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운명의 수로를 막고 있었던 것일까. 답답했던 가슴과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 잡지 못한 날들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른다.    

  

  냉동실을 말끔하게 정리하니 넘쳐나는 식재료에 당분간 장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왜 장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먹을 것이 없는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장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보다, 당분간 이어질 풍성한 식탁보다 기분 좋은 건 냉동실 속 빈 공간이다. 여유로운 공간 속 자리를 찾은 식재료들이 한눈에 들어오니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마치 내 마음의 물꼬 또한 트여 제 길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메말랐던 땅에 뜻밖에 다가온 물줄기는 영혼까지 시원하게 적셔준다.      


  어쩌면 나에게, 삶 속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책임, 머물렀던 시간에 대한 책임,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맺은 관계에 대한 책임.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 다는 것은 삶의 일부를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것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자리를 내주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그것을 나는 운명의 수로라고 부른다. 열심히 식재료를 사다 나르고 냉장고에 쌓아 두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비약적으로 그것이 일상이 되고 삶이 된다. 새로운 수로를 트기 위해서는 바뀔 필요가 있다. 어떠한 것에 삶의 조각을 내어줄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장바구니에 담아내는 물건들보다 마음의 바구니에 들이는 감정들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도 제 자리가 있다. 나는 자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해야 할 말들을 아낀다.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인사치레, 요즘 말로 영혼 없는 호응 또는 맞장구, 지켜질 리 없는 말뿐인 약속들처럼 무의미한 대화 속에 맺어지는 관계는 깊이를 다질 수가 없다. 진실된 한마디가 속절없는 열 마디보다 힘차게 상대방의 마음에 꽂히지 않던가. 자리를 잘못 찾은 말들은 상대의 마음 바구니에 도움되지 않는 감정들만 쌓이게 할 뿐이다.     


  더 이상 불필요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시간을 내어주고 싶지 않다. 제 자리를 찾는다는 것, 나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오래되어 존재 여부 조차 의심스러웠던 것들을 비우고 진실로 소중한 것들만 남겨두는 것에서 시작된다. 굳건한 신념과 가치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 무언가를 들일 때 신중해야 한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어떠한 사상과 삶의 방향성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들기도 한다.      


  당분간은 ‘냉털’(냉장고 털이)을 하며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삶을 살아보려 한다. 비우고 비우다 보면 채워야 할 시간이 오겠지만 그때엔 좀 더 의미 있는 것들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낭비하지 않고 끝까지 알차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기꺼이 삶에 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작가의 이전글 강 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