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가을
한국과 정 반대의 계절을 살고 있다. 벚꽃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할 즈음 이곳 호주의 더위는 비로소 수그러든다. 한쪽에서 푹푹 찌는 한더위가 시작되면 다른 한쪽에선 털실내화를 꺼내 신는다. 돌고 도는 계절은 지구를 위아래로 순환한다.
어느덧 가을이 바람을 타고 머릿결 한 올, 한 올을 거쳐 두 뺨에 안착한다. 차갑게 언 볼을 감싸 안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자 비로소 이 계절의 중심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붉게 물든 단풍, 눈이 시리도록 청량한 풍경은 날카로운 바람으로부터 눈과 마음을 속이기에 충분하다. 매일을 속아도 좋으니 이대로 좀 더 머물러 주기를, 하고 일기장에 적어본다. 사각사각.
차가운 아침 공기가 햇볕을 받아 살결 위에 녹아내린다. 그 온기가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온 몸이 나른해진다. 가을만이 주는 포근함이 있다. 수확의 풍요로움은 아이를 감싸 안는 엄마의 품과도 같아서 속부터 또똣하게 차오르는 충만함은 또 다른 이름의 행복이다. 그 이면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공존한다. 채워지지 않는 가슴 한편은 위로를 기다린다. 그런 가을이 좋다. 모순적인 모습이 압축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든을 넘어 아흔을 바라보는 우리 할머니는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계신다. 고관절 수술 후 회복이 더뎌 줄 곧 요양원에 지내신다. 고립된 삶은 나뭇가지 끝에 대롱 매달린 낙엽처럼 위태롭고도 간절하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손에 꼽을 만큼의 사람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변화 없는 일상 속에 만질 듯 만져지지 않는 유리병 속 세상처럼 할머니의 세상 역시 깜빡깜빡,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의 세상이 자꾸 깜빡이는 이유를 알고 있다. 병명을 입 밖으로 쉬이 내지는 않지만 모든 이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기억력이 자꾸 감퇴하고,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때로는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고, 수면장애가 동반되고 그 외에도 많은 증상들이 있다. 이곳에 있다가도 없다. 함께하고 있지만 함께할 수 없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두 세계의 거리는 비단 서울과 시드니 사이의 팔천여 킬로미터로 계산될 수 없다. 먼 거리만큼이나 애틋한 그리움은 기약 없는 시간을 더 길게 느껴지게 할 뿐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시절이 있다. 매끈한 이마에, 발그레한 볼, 반짝이는 눈동자. 누구에게나 봄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존재한다. 생명의 기운인 걸까. 생기가 넘치는 존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색깔로 구분한다면 옅은 분홍빛이려나, 싱그러운 초록빛이려나. 어쩌면 쨍하게 밝은 노란빛. 할머니에게도 봄날이 있었다. 찬란하게 눈부시던 시절은 활기찬 여름을 지나, 쌀쌀한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맞으려 한다.
생과 사의 사이에서 ‘생’ 보다는 ‘사’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서글프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을 때,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시작도 전에 공허하다. 맑은 정신은 쇠퇴하고 주름은 깊어진다. 생명의 기운은 어디로 가는 걸까? 한 이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옮겨가는 것일까, 아니면 희미하게 조금씩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러나 가을은 슬픈 계절이 아니다.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인생의 한때이다. 누구의 봄날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진리이자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편에 대한 위로이다. 계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계속되는 봄날이 예쁠 리 만무하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자 아름다운 이유이다. 가을 끝엔 반드시 기다리고 있는 겨울이 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고국에 닿을 때쯤 이면 포근한 한 송이 눈이 되어 할머니의 곁을 지켜주기를.
[낙엽을 쓸며]
시인 박 노해
흙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이 하도 고와
우수수 쌓여만 가도
쓸지 않고 두고 보네
하늘은 높아가고
맑은 바람은 서늘
문득 서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네
그대가 보고 싶어서
오늘은 대빗자루 들고
쌓인 잎들을 쓸어가네
낙엽이 길을 덮어 행여
그대 오시는 길 잃을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