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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Apr 30. 2018

지옥의 입구, 보마르조 정원

유럽의 신비로운 비밀 정원


"모든 이성이 산산조각난다."


이탈리아 로마로부터 92km 떨어진 인적 드문 시골 마을 보마르조Bormarzo에 세워진 정원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이 정원은 과연 심상치 않다. 괴물을 찢어발기고 있는 거대한 돌-거인이 땅 속에 파묻혀있는가 하면, 피사의 사탑같이 45도로 기울어진 돌탑이 서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피사의 사탑과는 달리 이 <기울어진 탑>은 원래부터가 쓰러질 것 같이 기울어진 모양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관람객들은 이 돌탑 안으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

 

사진출처 @Pinterest
사진출처 @BBC_Travel


거대한 조각상을 등에 올린 거북이와 기타 수많은 괴물의 형상들을 보라. 한마디로 '이상한 나라의 정원'이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무시무시한 형상은 바로 정원 입구에 세워진 <괴물의 입>일 것이다.


'모든 이성은 산산조각난다'라는 어구가 붉은색으로 쓰여있다. @Wikipedia


끊임없는 의문들이 생겨난다. 왜 '이성이 산산조각' 난다는 것일까? 정원의 그로테스크한 괴물들 때문일까? 아니라면 이성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초대'의 의미일까? 물론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비밀 정원의 건축자, 오르시니Orsini경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이 미스테리를 풀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ier Francesco Orsini, @Wikipedia


이 기괴한 정원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피에르 프란체스코 오르시니Pier Francesco Orsini(1513-1584) 경은 명망있는 오르시니 가문의 후계자로, 당대의 유명한 교양인이자 예술 후원가였다. 교황을 배출한 파르네세Farnese가문의 쥘리아와 결혼한 오르시니는 보마르조의 시골에 아내와 오붓하게 즐길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신혼의 평화로운 시절도 곧 막을 내렸으니, 이탈리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The Battle of Marciano in Val Di Chiana>, Giorgio Vasari


사실 오르시니가 살았던 시기는 한마디로 대 혼란의 시기였다.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전쟁들이 계속 발발했고, 종교 개혁과 반-종교개혁이 번갈아 일어나며 극심한 갈등을 초래했다. 오르시니 역시 이런 역사의 격동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친-교황 카톨릭 파의 장군으로 11년을 근무하며 수차례의 전쟁에 참가했는데, 독일과 벌인 1553년의 전투에선 바로 눈 앞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 오라지오 파르네세가 죽는 모습을 목격한다. 오르시니 역시 같은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혀 무려 3년간이나 포로로 수감됐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향년 33세, 11년간의 군 복역을 마치고 드디어 고대하던 집으로 향했건만, 머지않아 사랑하는 아내 쥘리아 역시 병마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오르시니가 칩거하며 이 유명한 <괴물의 정원> 건설에 몰두했던 것은.


사진 출처 @Italienways


어쩌면 이 괴물들은 오르시니가 겪은 끔찍한 비극들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모든 이성이 산산조각'나는 것 같은 혼돈에 마주해 내지른 개인의 비명이자 시대의 비명이 아니었을까? 마치 고야가 그림 <사르투누스>로 전쟁이 만연하던 시대의 광기를 표현해 냈듯이.


고야의 <사르투누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갔던 이 두명의 개인들은 이미 '질서'와 '조화로움'이라는 법칙으로는 그들이 살았던 광기와 혼란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특히 오르시니가 지어올린 보마르조 정원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괴이한, 기존의 예술적 전통들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작품으로, 시대의 혼돈이 어떻게 한 개인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시를 보여준다. (그가 예술가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사진출처  @BBC_Travel


한마디로 이 정원의 괴물들이 기존의 도상으로 해독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이 시대가 그토록 혼란스러웠고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일단 보마르조 정원 자체가 오르시니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개인적 은유'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정답을 찾는 것이 과연 중요할까. 기울어진 탑에 각인된 싯구가 말하듯,


칭송받던 세상의 다른 모든 신비도
이곳 신성한 숲의 신비를 이길 수는 없으니,
이곳은 오로지 그 자신만을 닮았고
그 외에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이곳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닮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보르마조 정원은 그 이후 완전히 망각된다. 혼란스런 시대의 감수성을 놀랍도록 독특하게 표현했지만 아직 시대는 그 감수성을 향유할 만큼 표용적이진 못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정원은 그 후 500여년이 지난 1946년, 살바도르 달리에 의해 재발견되기까지, 망각 속에서 부식되었고 삭아갔다.


사진출처 @BBC_Travel


이제 이곳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이지만 '조화', '균제', '비례'를 예술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두었던 당대의 시점으로 볼 때 이곳이 얼마나 파격적인 곳이었겠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거나, 오르시니가 설계한 '신성한 숲', 보마르조 정원은 인간 상상력의 기괴한 보고로 남아 이끼 끼고 부식된 채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오로지 이곳을 거닐 때에만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는 오르시니의 증언처럼, 어쩌면 이곳은 환상적인 예술로 비극적 시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절박함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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