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춘천
여름은 초록과 파랑 사이의 어딘가 즈음이다.
싱그러운 초록 숲 향기를 맡고 새파란 하늘 아래 카누를 타며 물레길을 휘젓고 돌아왔다. 탁하고 후덥지근한 회색빛 도시를 벗어나니 여름도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춘천 낭만에 대하여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으로 끙끙 앓던 청춘은 뜨거웠다. 그리고 청춘은 여전히 춘천에 머물러 있다. 청춘과 춘천이라는 두 단어는 마치 의도한 끝말잇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연상되는데, 1980~90년대 수많은 대학생들과 낭만을 싣고 경춘선을 오갔던 무궁화호 열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두의 청춘이 담긴 경춘선 무궁화호 열차는 지난 2012년 ‘ITX-청춘열차’에게 바톤을 넘겼다. 바톤을 이어 받은 청춘열차는 용산에서 춘천까지 작은 간이역들을 거쳐 1시간 만에 잇는다. 청춘의 종착역, 춘천의 낭만은 남이섬을 빼고 논하기 어렵다. 남이섬은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의 준상과 유진이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애틋한 추억을 나누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명실공히 대한민국 청춘남녀의 로맨틱 데이트 장소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뿐이겠는가.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에게 마저 로맨틱한 당일 여행지로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름 남이섬의 낭만은 싱그럽다. 섬 한 바퀴를 한동안 걸었음에도 땀 한 방울을 내지 않았다. 걷는 내내 우리의 키보다 몇 곱절이나 높은 초록 나무가 이어진 덕분이다. 남이섬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메타세쿼이아길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길, 벗길, 잣나무길, 자작나무길, 튤립나무길, 갈대숲길까지, 섬에 그려진 울창한 숲길은 자연 그대로의 공기청정기다. 덕분에 초록이 부족했던 우리는, 섬에서만큼은 마음껏 재잘재잘 유치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남이섬은 액티브한 면모도 가졌다. 특히 여름이면 남이섬을 둘러싸고 흐르는 북한강을 따라 수상 액티비티를 즐기는 이들로 활기차다. 바나나보트부터 디스코보트, 땅콩보트, 웨이크 보드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한가득 들려온다. 유람선 대신 짚라인을 이용해 섬으로 이동하는 용기를 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간이역 여행
이야기꾼을 만나고 왔다.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 소설가 말이다. 1908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봄봄>과 <동백꽃> 등 단편 소설 30편을 남기고 29세에 요절한 소설가다. 경춘선에는 그의 이름으로 명명한 김유정역이 있다. 2004년 12월, 최초로 사람의 이름을 딴 역이다.
역에서 5분 거리에는 김유정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세운 김유정 문학촌이 있다. 김유정 소설 속 배경이 된 장소가 문학촌 곳곳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남아 있다. 마을 뒷산은 <동백꽃>의 배경이 됐고, <산골나그네>의 그 물레방아도 여기 있다. <봄봄>의 첫사랑 점순이마저 우리를 반긴다. 마을 곳곳에서 전해지는 그의 해학적인 작품세계를 읽다 보면 왠지 발걸음은 능청스러워진다.
김유정역은 2012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새 역사로 이전했지만 구 역사는 지나간 시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간이역 플랫폼에는 감성적이면서도 유쾌한 문구와 시그널이 곳곳에 설치돼 포토존으로 조용히 인기몰이 중이다. 녹이 슨 철길에 영원히 정지한 열차 두 량이 서 있다. 경춘선을 달리던 옛 무궁화호 열차다.
열차 내부는 유정 북 카페와 관광안내소로 변신했다. 관광안내소는 춘천 관광 명소에 대한 정보와 책자를 얻고 100원짜리 동전 세 닢으로 검은콩 선식이나 믹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유정 북 카페는 지난해 2월 오픈했다. 좌석 위 선반에는 강원문인협회가 기부한 2,000여 권의 다양한 서적으로 가득하다. 열차 안 북 카페라니, 왠지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난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 아래에 앉아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돌아왔다.
우리에게 보내는 물길의 메시지
이번에는 물길 산책이다. 춘천 의암호를 따라 40km에 달하는 물레길을 만났다. 아름다운 강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산책할 수 있게 조성한 물길로, 지난 2011년 춘천 물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물레길 산책에는 튼튼한 양 팔이 필요하다. 카누 위에서 물결을 따라 직접 노를 저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누는 그 어떤 수상 액티비티보다 서정적이고 잔잔하다. 고요한 물레길 위에 나무 카약이 여러 척 둥둥 띄워진다. 느림의 미학을 느껴보길 바란다는 물길의 바람이 함께 담겼다. 물레길 산책로는 3가지 구간으로 나뉜다. 의암호수의 능선을 따라 의암댐 주변을 둘러보는 ‘의암댐 코스’, 붕어섬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붕어섬 코스’, 붕어섬을 거쳐 삼악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삼악산 코스’다. 세 구간 모두 약 3km 거리로 카누가 처음인 초보자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난이도다. 왕복 30~40분 소요된다.
카누는 두 사람의 호흡이 중요하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쪽에서 패들링해야 한다. 즉, 좌회전을 원하면 두 사람 모두 오른쪽에서 패들링하고, 우회전을 원하면 왼쪽에서 패들링하면 된다는 이야기. 하지만 패들링 횟수가 같아도 두 사람이 가진 힘의 차이 때문에 방향은 다소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세심한 힘 조절이 필요하다. 아차, 하면 아찔해진다.
카누는 패들링 한 번에 쭉쭉 잘 나아가다가도 애타는 속도 모르고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인생과도 닮았다. 때로는 크게 요동치는 물결에 잠시 노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덕분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천천히 노를 저으면 된다는 물레길의 메시지는 마음에 콕 박혔다.
테이스티 로드 in 춘천
입맛 살려주는 막국수
메밀향이 가득한 막국수 한 그릇은 강원도, 그중에서도 춘천의 별미 중 하나다. 껍데기를 벗기고 분쇄한 메밀을 반죽해 국수를 뽑아내어 양념에 비비거나 동치미, 김치 국물 등에 말아먹는다. 특히 더운 여름날이면 새콤달콤한 막국수 한 그릇에 입맛이 펄떡 살아나기 마련이다. 춘천 어느 식당에 가도 ‘기본’은 자랑하는 막국수를 맛볼 수 있다. 남이섬 선착장 입구 근처에도 닭갈비와 함께 막국수 식당들이 즐비하다. 일정 금액 이상 식사시 종일 무료 주차 서비스를 제공하니 참고하시길.
숯불에 노릇노릇 닭갈비
춘천하면 단연 닭갈비 아니겠는가. 갖은 채소와 양념을 넣은 철판 닭갈비 또는 숯불에 굽는 닭갈비 중 개인의 취향만 생각하면 되시겠다. 김유정역에서 5분 거리에 ‘준섭이네’가 있다. 막장닭갈비가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다. ‘막장’은 강원도식 숙성된장으로 콩, 보리, 소금 등을 넣고 만든 메주로 담근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닭다리 살 위에 막장을 얇게 펴 발라 숯불에 굽는다. 따로 내어주는 막장 또는 소금에 살짝 찍어 먹으면 된다.
준섭이네 닭갈비 | 숯불모듬(소금, 막장, 고추장) 3만원, 각 닭갈비 메뉴 1인 기준 1만1,000원, 막국수 7,000원 주소 강원 춘천시 신동면 금병의숙길 14 전화 033 261 7998 영업시간 09:00~22:00
글·사진=손고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