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비스트(Traviest)는 <트래비>의 여행 뉴스와 스토리를 발굴하는 콘텐츠 서포터즈입니다.
고지혜 : Finland Kiilopää
핀란드 킬로파 핀란드 국립공원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겨울, 홀로 핀란드 북극지방인 ‘킬로파’로 떠났다. 목적은 단 하나, 오로라를 보는 것. 인천에서 헬싱키까지 약 10시간, 또 헬싱키에서 이발로(Ivalo) 공항까지 약 2시간. 그리고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 참 머나먼 여정이었다. 겨울에 극야인 이곳에서는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이른 아침에도 해가 뜨지 않았고, 오후 4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졌다.
킬로파는 호텔, 호스텔, 독채로 이루어진 리조트 하나와 국립공원밖에 없는 허허벌판이다. 오로라를 볼 확률이 매우 높은 지역인데, 날씨가 따라 주지 않았다. 머무는 내내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어둠만 가득한 곳에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즐거움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리조트에서 진행하는 무료 클래스가 있었다. 스키 클래스를 신청했는데 날씨 문제로 취소됐다. 모든 게 따라 주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정한 강사님이 다른 날 개인 클래스를 열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드넓은 핀란드 국립공원을 스키로 달렸다. 청량한 공기가 참 좋았던 순간. 이곳에서의 5일은 순식간에 지났고,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나는 눈물을 쏟았다.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던 이곳에서 생판 남에게, 심지어 언어도 인종도 다른 외국인에게 받았던 호의가 너무나도 감사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감정의 울림이 컸던 나의 인생 여행지 킬로파. 언젠간 다시 갈 수 있을까.
고지혜
자유롭게 여행하며 일하는 프리랜서 마케터. 여행하는 것만큼 여행을 글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권라희 : Switzerland Valls
스위스 발스 테르메 발스
2023년 7월 스위스 건축 여행을 떠났을 당시, 스위스 남부 그라우뷘덴(Graubünden)의 작은 마을 ‘발스’에서 머문 시간이 떠오른다.
발스에서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웠다. 일명 ‘발스 스파’라 불리는 ‘테르메 발스(The Therme Vals)’는 알프스 자연을 재현했다. 회색빛 발스의 돌을 곱게 다듬어 켜켜이 쌓았고, 바위 틈새로 뿜어져 나온 온천수를 끌어모아 탕을 만들었다. 천장 틈새로 예리하게 쏟아지는 빛은 동굴에 내린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곳에 몸을 담그고 시각과 청각, 촉각으로 물과 빛, 바위의 숨결을 느꼈다.
테르메 발스는 버려진 온천장을 되살리고픈 주민들과 이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완벽주의자 건축가, ‘피터 춤토르(Peter Zumthor)가 합세해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건축 작품이다. 공들여 지은 건축물의 아름다움에는 그곳을 향한, 짓는 이들의 마음이 한결같음에 대한 찬사도 녹아 있다. 테르메 발스를 통해 누군가의 번뜩이는 천재성에 기대지 않고 우직한 마음으로 함께 돌을 쌓아 간 주민들의 마음을 읽는다. 페터 춤토르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데는, 분명 주민들의 노고가 한몫했다.
권라희
건축, 예술, 프리다이빙. 3가지의 테마를 바탕으로 여행한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내공을 쌓으며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김수환 : Japan Kyoto
일본 교토 겐코안
나의 첫 일본 여행은 무려 2주에 걸친 교토 여행이었다. 긴 여정이었지만 도시의 다채로운 풍경과 여전히 기억에 선한 추억을 채워 넣느라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장면을 고르자면 ‘겐코안(源光庵)’이다. 외진 곳에 자리한 조용한 불교 사찰.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야 해서 도중에 발길을 돌릴지 고민하기도 했는데, 본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불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격자무늬가 주변을 덧댄 네모난 창이 하나 보인다. 바로 옆으로 네모와 대비를 이루는 동그란 창이 이어서 보인다. ‘미혹의 창’과 ‘깨달음의 창’이란다. 모양과 이름이 직관적이라 불교에 문외한인 나도 보자마자 삶에 얽히고설키는 ‘미혹’이 결국 ‘깨달음’이 된다는 의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창 앞에 자리 잡고 십여 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감히 철학적이라고 해도 될까. 여행 중에 만난 묘한 기분이었다. 그 기억에 매번 교토를 찾을 때마다 겐코안을 찾는다. 벚꽃이 피고 단풍이 들고 하얀 눈이 쌓이는 풍경이 2개의 창 너머로 보이는 각각의 시기에 겐코안을 다시금 찾고 싶다.
김수환
먼 곳에 대한 동경. 그 동경으로 말미암은 여행 병을 뜻하는 페른베(Fernweh)를 필명 삼아 예전,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동경을 적어 가길 꿈꾼다.
김유니나 : Laos Vang Vieng
라오스 방비엥 비엥타라 빌라
마음 맞는 이들과 라오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안에 도착해서 곧장 방비엥으로 향했다. 방비엥에 도착해서 썽태우로 갈아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는데, 도착과 동시에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목, 프론트, 객실로 이어지는 산책길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라오스 방비엥에 위치한 ‘비엥타라 빌라’. 워낙 인기가 많은 숙소라 성수기에는 예약이 무척 힘들다. 몇 번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곳. 이 빌라의 단점은 방비엥 시내와 멀다는 부분인데, 그래서 더욱 방비엥의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주니어 빌라는 단독 빌라라 사생활 보호가 가능하고 개별 테라스에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심지어 조식도 방으로 직접 가져다 준다.
조식은 4가지 종류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시 방비엥을 찾는다면 고민치 않고 다시 방문하고 싶다. 머무는 것 자체로 여행할 수 있었던 곳.
김유니나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낭만 여행자. 언제나 여행의 일상화를 꿈꾸고 있다. 맛있는 음식, 술, 음악이 있다면 여행 이야기로 밤샘 수다도 가능한 애주가.
정자영 : Chile Patagonia
칠레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프러포즈로 세계여행을 제안받았다. 망설임 없이 나의 대답은 ‘YES’였고 비행기표를 사기도 전, 가장 먼저 예약했던 곳이 바로 ‘토레스 델 파이네’의 캠핑장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칠레, 아르헨티나의 끝 파타고니아 지역에 위치한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푸에르토 나탈레스’라는 베이스캠프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 후, 다시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국립공원 내의 호수는 거대한 빙하와 바위의 다양한 성분들이 합쳐져 오묘한 옥빛을 띄고 있다. 새하얀 나무들과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는 인간이 발을 디디면 안 될 것 같은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곳의 절벽, 바람, 이끼 모든 것은 자연이 오랫동안 지켜 온 태초의 모습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대표 코스는 4박 5일이 소요되는 ‘W 코스’와 7박 8일이 소요되는 ‘O 코스’가 있다. 나는 운동을 즐기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체력을 가졌기에 망설임 없이 W 코스를 선택했다. 4일간 먹을 음식, 침낭, 텐트, 옷 등을 구겨 넣고 몸집만 해진 등산 가방을 짊어지고 등산길에 올랐다. 1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하루 7시간 이상 걷다 보니 첫날부터 나의 발가락들은 비상이었다. 양 검지 발가락 사이에는 투명한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고, 아직 캠핑장까지 까마득한데 발가락들은 못 걷겠다고 난리였다. 밴드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휴지를 돌돌 말아 발가락을 감쌌다.
설상가상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눈이 내린다. 방금 전 비가 내리다가 돌아서면 눈이 되고, 또 순식간에 해가 뜨는 날씨다. 춥다고 패딩을 꺼내 입었다가 덥다고 다시 가방에 집어넣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마지막 날 토레스 델 파이네의 하이라이트인 삼봉(3개의 화강암 봉우리)의 일출을 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믿을 건 내 두 다리뿐. 동이 트기 전, 가장 춥다는 말을 실감한 새벽이었다. 발가락이 꽁꽁 얼어 감각이 무뎌질 때 즈음 잿빛이었던 3개의 봉우리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음 같던 봉우리가 어느새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고요한 곳에 새 한 마리의 울음이 청아하게 퍼졌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할 수 있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라고 되새기며 끝까지 올라왔기에 누릴 수 있는 절경이었다. 감사하게도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날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기억은 내게 근거 있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을 해냈는데 앞으로 다른 힘든 일쯤이야.
정자영
여행과 캠핑을 너무 좋아하는 세계 여행자, 그리고 캠퍼.
유의민 : Egypt Hurghada
이집트 후루가다 홍해
신혼여행으로 떠난 이집트. 카이로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마저 캔슬시켜 버리는 소음과 KF94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매연과 찌릿한 냄새. 카이로에서 5일을 보낸 후 ‘후루가다’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드디어 정신없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물론 후루가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짐을 옮겨주겠다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호객꾼들은 여전했지만, 이집트 신혼여행 6일차가 되니 이 정도는 환영 인사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우리는 우버 택시를 불러 홍해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로 향했다. 택시로 40여 분을 달렸을까. 생애 첫 홍해 영접. 이름처럼 빨간 바다가 아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거실 소파와 침대에서도 홍해가 보이는 오션뷰 스위트룸에 체크인을 마치고 그대로 해변으로 뛰쳐나갔다. 3월의 홍해는 다소 선선한 공기에 바닷물도 꽤나 시원한 편이었다.
습도라고는 1%도 안 느껴지는 아프리카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 오후가 한창인 해변은 한적하고 여유가 넘쳤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건 잔잔한 물결 소리와 살랑 부는 바람 소리뿐. 이집트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카이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휴양과 관광 사이에서 고민할 때 하나같이 신혼여행은 당연지사 ‘휴양’이라고 했던 결혼 선배들의 조언이 이해가 되는 순간. 후루가다는 이집트에서 찾은 최고의 신혼여행지.
유의민
본캐는 직장인, 부캐는 여행작가. 언젠가 부캐가 본캐가 될 그날을 그리며 배우고 도전하는 자세로 여행 중이다. 올해 <트래비>와 함께 또 한 번의 성장을 꿈꾼다.
천준현 : Uzbekistan Samarkand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역사 박물관
2023년 8월, 2030 부산 월드엑스포 유치 홍보 활동을 위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다. 대학교 방문, 경제협력포럼 등의 공식 행사들에 참여 후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아프로시압 역사 박물관(Afrosiab History Museum)을 찾았다.
사실 어릴 적부터 박물관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나는 이 또한 공식적인 행사의 일부라고 위안 삼았다. 방문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하지만 박물관을 찾았을 때 외관에 먼저 크게 놀랐다. 본관과 박물관 외부에 전시되어 있는 중앙아시아의 역사 유물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야외에서만 볼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벽화나 건축물들을 가득 전시 중이다. 역사적 내용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들이 주는 신비함이 매력적이었다.
내부 전시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신라시대 인물로 추정되는 이가 그린 옛 우즈베키스탄 방문 벽화다. 이곳이 한국과 오랜 역사를 나눴던 국가임을 배우게 됐다. 사실 이 모든 감상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현지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환대 덕분이다. 신비로움과 따뜻함이 공존했던 장소.
천준현
인간은 늘 호기심을 유지할 때 큰 재미를 느낀다. 그래서 정답을 찾는 과정만 있는 나의 여행이 좋다. 불확실한 여행의 재미를 아는 여행자.
이소정 : Mongolia Khovsgol
몽골 홉스골 호수
겨울 몽골은 눈이 부셨다. 흰 눈에 반사된 빛 때문에 실눈을 뜨고 앞을 봐야 할 정도로. 주섬주섬 배낭에서 선글라스를 찾는다. 영하 20도는 우스운, 송곳 같은 추위가 더 문제다. 콧속 점액이 실시간으로 얼어붙어서 코가 뻐근해지는 기분이다. 여행 내내 코를 몇 번이나 찡그려야 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홉스골 호수까지의 거리는 약 1,000km. <신기한 스쿨버스>에 나올 법한 귀여운 생김새의 ‘푸르공(러시아산 오프로드 밴)’을 타고 영하의 기온으로 꽝꽝 얼어 버린 홉스골 호수를 향해 달린다. 무려 3일간 꾸준히 이동해야 하는데 하루 평균 이동시간이 8시간 정도다. 물론 목적지로 한 번에 향하는 법은 없다.
노을 지는 설산 앞에 차를 멈추고 분홍빛 노을과 섞인 찬 공기를 단숨에 삼켜 본다. 노을보다 더 짙은 색으로 볼이 부르틀 때까지. 노을을 완전히 보내면,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길게 뻗은 도로 옆, 누구도 발자국을 찍지 않은 흰색 눈밭은 또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털부츠 안에 눈이 잔뜩 들어갈 때까지 뛰어다니다 폭삭 누워 버렸다. 기구가 3개밖에 없는 어느 작은 시골 놀이공원을 발견했을 땐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었다.
우린 수도 없이 차를 세웠다(말과 눈 맞추며 노상 방뇨해야했던 상황도 포함). 마침내 목적지인 홉스골 호수에 도착했다. 제주도 1.5배 크기에 이르는 호수 한가운데에 푸르공을 세운다. 그 뒤에 썰매를 이어 붙여 얼음 위를 달려 본다. 어릴 적에 꿈에서만 상상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 얼음 호수 위에선 중력을 무시하고 지구와 나 사이에 공백이 생긴 듯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여행이 끝날 때쯤엔 그 공백 안에 어떤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이곳에 다시 올 것만 같은 기분, 찰랑이는 홉스골 호수의 여름 윤슬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홉스골 호수는 언제나, 눈이 부시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소정
자주 여행하고, 가끔 글을 쓰는 배낭여행자.
지예지 :: Japan Ibaraki
일본 이바라키현
국영 히타치 해변공원
성인이 되고 홀로 떠난 첫 여행지는 도쿄 근교 도시, ‘미토(이바라키현 미토시)’. 사실 도쿄를 여행하려고 했는데 이바라키행 티켓이 조금 더 저렴한 것 아닌가. 그리하여 미토에서 이틀을 머물다 도쿄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미토의 대표 여행지인 히타치 해변공원의 ‘미하라시 언덕’까지는 꽤 걸어야 했는데, 지독히도 더운 한여름이었다. 입고 있던 싸구려 원피스의 색소가 땀에 묻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하필 새빨간 원피스였다. 눈앞이 저릿한 정도의 뙤약볕에 익숙해질 즈음, 드넓은 대지가 내 앞에 펼쳐졌다. ‘와아….’ 사실 더위에 조금은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탄성만큼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광활한 땅을 눈에 담아 본 적이 있던가, 평생을 나고 자란 시골 동네에도 이런 풍경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풍경은 간단했다. 꽃, 꽃, 꽃, 땅, 하늘, 그리고 작은 집과 구름…. 듬성듬성 사람이 보였는데 댑싸리에 그 머릿수가 한참 밀렸다. 기분이 좋았다. 땀은 비 오듯 흘렀고, 나무 그늘에 모여 숨을 골랐다. 한 번씩 바람이 불면 등 뒤로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이 ‘여름이구나’ 싶었다. 동화 같은 뭉게구름이 무리를 지어 떠다닌다. 공기가 뜨끈해서 그런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게 여름이란 존재는 이때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히타치 해변공원에서의 쨍한 태양과 나부끼는 잎사귀, 바삐 움직이는 벌과 나비, 고개를 젖힌 해바라기의 풍경을 마치 오늘인양 곱씹는 것이다. 스무 살의 여름이었다.
지예지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에디터. 모험과 여행을 즐기는 낭만주의자.
이희진 : Luxembourg
룩셈부르크 보크 포대
룩셈부르크를 만난 건 한 달간의 긴 여행이 끝나 갈 즈음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는 내게 정신 차리라는 듯 거센 빗방울을 내리꽂는다. 시작부터 쉽지가 않구나…. 비를 피해 기차역 바로 앞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고는 트램에 몸을 실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 지도에서 한 번에 찾기 힘들 만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의 하나지만, 1인당 국민 소득이 세계 1위인 부자 나라다. 철강, 금융산업이 발달했으며 현재는 우주산업을 내세우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요새로 이뤄져 있다. 해발고도 300m 위에 위치해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요새’라 불리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수차례 침략을 받으며 파괴와 복구를 반복해야 했다. 수도 룩셈부르크를 지켜 온 50m가 넘는 높은 성벽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다.
거친 비를 뚫고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곳, 보크 포대에 도착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코니. 한 번이라도 이곳의 풍경을 감상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말을 절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풍경이 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요새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알제트 강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동화 속 중세마을과 순수한 자연이 어우러진 이 풍경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절경이었다. 그간의 힘든 여정을 한순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룩셈부르크는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어, 한나절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대부분 도보 관광이 가능한 데다 모든 대중교통이 무료다. 보크 포대 성벽 아래 펼쳐진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마을, 그룬트 마을로 향했다. 이토록 평화롭고 고요한 마을이 또 있을까. 마치 상상 속에만 그리던 동화 속 마을을 현실에서 걷는 기분이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절벽과 요새는 마을에서 올려다보니 더욱 웅장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힘든 여정의 피로도 잊은 채 룩셈부르크를 몇 바퀴 돌고 또 돌았다. 유럽의 숨은 요새, 룩셈부르크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이희진
혼행예찬을 부르짖는 자칭 ‘혼행전문가’. 나홀로 세계도시 300여 개를 탐험한 직장인 여행가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 인생을 배우며 진정한 삶의 동력을 얻고 있다.
송현서 : USA New York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뉴욕의 겨울을 볼 줄이야. 2년 만에 뉴욕에 또 올 줄이야. 뉴욕에서 한 달 이상을 지낼 줄이야. 여행자의 이야기는 항상 예측 불가다. 2년 전에 뉴욕을 여행하면서 ‘당분간 오기 힘들겠지’라며 아쉬워했는데, 벌써 뉴욕에 온 지 40일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몇번이고 반복해서 가는 장소들이 생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은 곳이 ‘센트럴파크’다. 짧은 여행으로 왔을 때는 쉽 메도우(Sheep Meadow)와 갭스토우 브릿지(Gapstow Bridge)
2개 구역만 치고 빠지듯이 돌아봤는데, 겨울에만 운영하는 스케이트장 울먼 링크(Wollman Rink)도 보고 내가 센트럴파크에서 가장 사랑하는 구도인 그레이트 론 소프트볼 필드(Great Lawn Softball Field) 인근도 알게 됐다. 눈이 가득 쌓인 날, 이곳에서 벨비디어 성(Belvedere Castle)을 바라볼 때면 뉴욕에 온 내 인생을 칭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뉴욕의 겨울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매서운 바람이 머무는 겨울이었지만, 인생 도시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 틀을 깨다 못해 ‘틀이 있긴 할까?’라고 되묻게 되는 도시. 그 속을 여행하며 도전하고 싶은 것들을 여럿 떠올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느낌의 옷만 고수했던 내가 핑크색 바지를 도전하게 만든 도시. 뉴욕은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건넨 여행지다.
송현서
여행으로 인생을 완성해 가는 것이 목표인 뚜벅이 에디터.
임가원 : Korea Suwon
대한민국 수원 방화정
친구와 함께 떠난 1박 2일의 짧은 국내 여행. 우리의 목적지는 경기도 수원이었다. 수원은 뭐랄까, 참 풍류적인 도시다. 적당히 붐비는 사람들, 졸졸 흐르는 물소리, 살랑이는 바람. 거리 곳곳 넘쳐나는 예쁜 카페들과 밤이 되면 이따금 들려오는 폭죽 소리. 수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방화수류정’이다.
1794년, 수원성곽을 축조할 당시 세운 누각인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의미답게 자연경관이 상당히 뛰어나다. 파릇한 잔디밭에서 피크닉 중인 사람들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이게 힐링이지’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음악 삼아 잠시 눈을 붙여 본다. 이때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수원을 찾을 때면 항상 방화수류정을 찾는다. 수원에는 이외에도 카페 가득한 행궁동 카페거리, 가지각색의 음식 냄새가 가득 맴도는 행리단길, 밤 산책하기 좋은 광교 호수공원 등 볼거리가 다채롭다.
임가원
한 단어로 수식하기엔 부족한, 취미 부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행러버.
글·사진 트래비스트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