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대나무도, 산도, 내 마음도.
싱그러운 녹음 사이 쏟아지는 따사로움에 지그시 눈을 감아 본다.
달빛이 춤추는 담빛길
담양 담빛길에는 달빛골목 창작소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이곳은 죽제품 거리였다. 담양의 죽제품은 재질이 단단하고 코팅이 된 듯한 질감 덕에 과거 널리 이름을 알렸다. 안타깝게도 산업화와 동시에 밀려오는 값싼 플라스틱과 동남아 제품 공세에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렇게 휑해진 거리를, 예술 공방들이 다시금 채우며 은은히 담빛길을 밝혀 가는 중이다. 달빛골목 창작소에서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체험 수업이 가득하다. 특히 대나무 공예체험 수업을 즐길 수 있는 공방 ‘애담’은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다양한 색의 대나무를 엮어 연필꽂이, 향낭 주머니 등을 만들어 소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빛길 매력에 빠져들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귓가를 간질이는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원형 통 유리창 안쪽으로 보이는 부스에서 라디오 방송 진행이 한창이다. 마침 담빛 음악창고 코너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이 끝날 때 즈음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니, 거리에 달빛이 가득 들어찬다. 비로소 진정한 달빛골목 창작소다운 분위기다.
담빛라디오스타 스튜디오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3길 3
오픈: 매주 토요일 14:00~16:00
전화: 061 381 8241
예술과 휴식이 있는 아지트
담양관방제림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빛예술창고가 등장한다. 갤러리와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마침 팝아트 전시회가 한창이었다. 감각적인 색채와 현대적인 소재들 덕에 창고 안이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담빛예술창고는 재능 있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공모 선정을 거쳐 무료 대관을 진행한다.
잠시 앉아 쉴 겸 카페로 향했다. 나지막한 음악에 섞인 수다소리가 정겹다. 2층, 널찍한 창가에 앉아 커피 향과 관방제림의 풍경을 음미했다. 건물 벽면에 쓰여 있는 ‘南松倉庫(남송창고)’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과거, 정부의 양곡 보관창고로 사용되었다. 2004년 추곡수매제도가 없어지며 기능을 잃고 10년간 텅 빈 창고로 버려져 있었다. 철거 위기의 공간이 2015년 개관 이후, 해마다 10만명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한 셈이다. 담빛예술창고를 찾는다면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파이프 오르간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총 792개의 대나무로 제작된 오르간은 습기와 온도에 민감해 겨울 동안 연주가 중단되었으나 5월 주말부터 정기 연주를 재개했다.
담빛예술창고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7길 75
오픈: 동절기(10~3월) 09:00~18:00, 하절기(4~9월) 10:00~19:00(매월 둘째·넷째 주 월요일, 설 및 추석 당일 휴무)
전화: 061 383 8241
입장료: 무료
술 빚던 곳, 예술을 빚다
본래 60여 년간 술을 빚던 곳이었다. 해동 주조장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주조장을 지키려 했지만, 외국 주류의 바람은 매우 거셌다. 결국 2010년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술 공장이었던 특성을 살려 막걸리와 정종, 수제 맥주, 와인 등을 만들어 보는 체험공간을 마련했고, 주조장 아카이브도 오픈했다. 또한 100인 드로잉전, 술통파티, 해동문화축제 등을 개최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자연스럽게 예술과 가까워지다 보니 지역주민들이 먼저 제안하기 시작했다. “술이 아닌 예술을 빚어 보자!” 그렇게 해동문화학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저마다의 재주를 살려 자신이 수업의 주최가 될 수도, 다른 이들의 학생이 될 수도 있다. 초여름, 해동문화학교에는 만개한 예술 꽃으로 봄기운이 가실 줄 모른다.
해동문화학교
주소: 전남 담양군 담양읍 지침 1길 6
오픈: 상반기 4월2일~5월25일, 하반기 6월4일~7월20일
홈페이지: www.dycf.or.kr
입장료: 무료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자그마한 손바닥 뻗어 흙돌담 꽉 붙들고 있는 담쟁이넝쿨을 뒤로하고 창평 슬로시티 삼지내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세 개의 시내가 흐른다. 그 모습이 봉황의 날개가 감싸 안은 모양새라 하여 ‘삼지내’라고 불린단다.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된 삼지내마을 안길 따라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본다. 집 앞, 개성 가득한 명패가 눈길을 끈다. ‘아궁이가 예쁜 쌀엿집’, ‘석류가 겁나 많은 집’ 등 소박한 유쾌함이 가득하다. 마을 한 바퀴를 다 돌아볼 때쯤, 달팽이 가게 앞에 도착했다. 명인들이 만든 슬로푸드와 슬로아트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물론 체험 수업도 가능하다.
잠시 벤치에 걸터앉아 맷돌 커피 한 잔을 음미했다. 커피 향이 천천히 코끝을 감싼다. 여기에 달짝지근한 창평한과를 곁들이면 더없이 좋다. 창평한과는 찹쌀가루를 쪄 내 기름에 한 번 튀기고, 조청에 담근 뒤 견과류 고물을 묻혀 낸다. 과거 양녕대군이 담양에 왔을 당시, 수라간 궁녀들에게 전수받은 궁중 방식을 계승하고 있다. 마침 명인 체험관에서 창평쌀엿 수업이 한창이다. 좀처럼 마음대로 떨어지지 않는 엿가락을 두고 씨름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창평 슬로시티 삼지내마을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돌담길 56-24
오픈: 09:00~18:00(매주 월요일 휴무)
전화: 061 383 3807
홈페이지: www.slowcp.com/kr
입장료: 무료, 체험료 별도
시간의 맛, 인생의 깊이
창평 삼지내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데는 기순도 전통 명인의 역할이 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국빈만찬에 사용된 씨간장은 무려 360년의 세월을 머금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통을 고수하며 건강한 밥상을 만들어 온 공로를 인정하고, 삼지내마을을 그 바탕으로 여긴 셈이다.
삼지내마을에서 자전거로 10여 분, 창평 유천리에 위치한 기순도 전통장에 도착했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수많은 장항아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배불뚝이 항아리는 장을 그득히 담고 있어 푸근해 보인다. 기순도 명인 역시 매한가지다. “오랜 시간 장을 담갔지만 복잡한 과정에서 한 가지만 잘못되어도 제 맛을 내지 못해요. 늘 정성을 다해도 자신할 수 없는 이유죠.” 그녀의 진심 어린 한마디는 장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기순도 전통장에서는 단체 방문예약객들에 한해 장 담그기 체험을 진행할 수 있다. 자연의 손을 빌려 시간을 담그는 장처럼, 나 역시 깊어지길 바랐다. 결국 시간의 맛은 모든 것에 배기 마련일 테니.
기순도 전통장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길 154-15
오픈: 09:00~16:00
전화: 061 383 6209
홈페이지: www.ksdo.co.kr
요금: 단체(최소 20인)만 가능, 청소년 1만5,000원, 성인 2만원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 거야
인생은 도전이라 했던가! 결국 나는 담양 하늘을 날고 말았다.
담양패러글라이딩 체험비행은 강사와 짝을 이루어 진행한다. 중요사항을 숙지한 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올랐다. 정상에서 빼꼼,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밀조밀 마을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출발선에 서자 강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둘이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해요. 자, 뛸게요. 하나, 둘, 셋!” 몸을 숙인 뒤 힘차게 발을 굴렀다. 세찬 바람에 몇 번이나 휘청거렸지만 곧 두 발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그렇게 하늘을 날았다. ‘가슴속이 탁 트인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시원한 바람결이 내 얼굴에 오롯이 느껴졌다. 담양의 산세와 평야를 구경하기에 하늘은 최고의 전망대였다.
이날 체험 비행을 즐기러 온 많은 이들을 만났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같은 하늘을 날았다. 그들도, 나도 깨달았을 것이다. 결국 세찬 바람을 견디어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담양패러글라이딩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107
오픈: 09:00~18:00(예약 필수)
전화: 010 4840 3330
홈페이지: paratandem.modoo.at
요금: 체험비행 A~C코스 8~12만원, 사진 및 영상 촬영 1~2만원
하얀 커피 꽃과 빨간 커피 체리를 찾아
국내에서 커피농장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다. 게다가 로스팅 과정도 체험할 수 있다니! 커피 애호가들에게 이보다 설레는 소식이 또 있을까. 고민 없이 곧장 담양커피농장으로 향했다.
담양커피농장은 금성면 석현리에 자리하고 있다. 1,300여 평방미터 규모의 현대식 하우스로 카페 내부는 각종 커피 기구와 아프리카 관련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어 이국적이다. 커피하우스에는 3대륙 8개국 10종의 아라비카종 성목 200그루와, 1~3년생 5,000그루, 유묘 1,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커피나무는 평균 15~25°C의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지만 담양커피농장에서는 유묘 때부터 저온에 두고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시켰기 때문에 튼튼히 잘 자란다. 체험은 커피의 종류와 특성을 알아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하우스에 들어가 커피나무 열매를 자세히 관찰할 수도 있다. 알알이 맺힌 열매는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탐스럽게 익어 간다.
커피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커피콩을 망에 넣고 로스팅을 시작한다. 고르게 로스팅 된 커피콩을 분쇄기에 갈아 커피를 내렸다. 뭉근히 잔에 담기는 커피 한 잔,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수행과도 같다. 6월 초여름, 하얀 커피 꽃이 핀다. 진귀한 풍경이기 때문에 꼭 찾아가 보길 권한다.
담양커피농장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석현리 99-6
오픈: 09:00~18:00
전화: 061 381 8879
홈페이지: blog.naver.com/forestopia
요금: 핸드드립 5,000원, 골드캐슬 1만5,000원, 커피체험 A~D, S타입 1~3만원
호수를 끼고 흙길을 걷다
담양군 용면에 자리하고 있는 담양호는 담양 평야를 촉촉이 적셔 주는 인공호수다. 굽이진 산을 끼고 있는 호수의 모습은 마치 용의 형상과도 비슷하다. 덕분에, 영산강의 발원지인 가마골에는 하늘에 미처 오르지 못한 황룡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마루길에서는 담양호의 수려함과 추월산의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총 구간 3.9km 길이의 용마루는 흙길과 데크길이 적절히 조화로워 걷기에 좋다. 따스한 볕을 만끽하며 목교를 시작점으로 용마루 길을 여유로이 거닐었다. 목교는 짧지만 높이가 꽤 있어 아찔함이 느껴진다. 발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담양호가 수줍게 찰랑인다. 날씨가 화창해 많은 이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이 소근거리는 수다는 필히 추억으로 간직될 이야기들일 테다. 담양호는 그들의 이야기를 물밑으로 고스란히 가라앉힌다. 그 언젠가 다시금 이곳을 찾았을 때, 속삭여 줄 심산으로.
담양호 용마루길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추월산로 981
오픈: 09:00~18:00
전화: 061 380 3063
홈페이지: tour.damyang.go.kr/index.damyang
찾아가기: 담양버스터미널에서 군내 버스 추월산, 용면, 가마골행 60-1번 버스 탑승, 20분 소요.
트래비스트 권라희는 공연 평론과 대본을 쓰는 프리랜서 기고가다. 주로 예술과 역사, 축제를 테마로 여행한다. 요즘 문화 재생과 슬로시티에 관심이 많다.
글·사진 Traviest 권라희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