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한글을 만나는 방법
알면서도 쉽게 잊는다. 항상 그곳에 있어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소중한 것 이상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우리 글, 한글이 그렇다.
한글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 김철민 관장을 만났다.
김철민 관장은 올해까지 26년의 공무원 재직기간 중 16년을 관광 분야에서 일했다. 관광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며 이론과 실무에서 두루 쌓은 지식과 경험을 한글박물관 운영에도 접목해 나가고 있다.
가보셨나요? 중앙박물관 옆, 한글박물관
“한글박물관은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개관했습니다. 이제 만 2년을 넘긴 신생 박물관이죠. 문자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와 어린이들, 한글 공부를 하는 외국인들이 주로 관람을 하러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다양한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아오도록 노력해야지요.”
국립 한글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표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한글박물관으로 가자’고 하면 중앙박물관 입구에 뚝 떨궈 주어서 3분 정도는 더 걸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용산구에 살면서도 이곳에 ‘한글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바로 나였다)도 있다. 그러나 여행을 좋아하는 당신이 한글박물관이 얼마나 유니크한 곳인지 알게 된다면,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철민 관장은 한글박물관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박물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에서 그 나라의 문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 몇 개나 있을까요? 전 세계에 딱 2개뿐입니다. 중국의 국가 문자 박물관 그리고 한국의 한글박물관. 그만큼 자랑할 만한 고유의 문자를 가진 나라가 없다는 뜻이죠. 그에 비해 한글은 자랑할 거리가 넘쳐납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누가·왜·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아는 문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문자이지요. 이렇게 훌륭한 한글의 가치를 알리는 단 하나뿐인 박물관이 바로 한글박물관입니다.”
나만 몰랐나, 1만 1,172개의 소리를 표현하는 한글
김철민 관장은 “세계적인 해외 석학들이 한글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한글의 우수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총, 균, 쇠>의 저자이기도 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UCLA 교수는 한국이 고속 성장한 가장 큰 이유로 한글을 꼽으며,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미국 시카고대학의 언어학자인 J.D 맥컬리 교수는 한글은 인류 지성의 최고의 산물이며, 한글날은 모든 언어학자들이 기념해야 할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관장은 한글의 과학성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맨 처음 한글은 자음 다섯 개와 모음 세 개로 시작했어요. 자음 다섯 개는 의학자들과 함께 그 발음을 할 때의 혓바닥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ㄱ’ 발음을 할 때는 혀가 기역자로, ‘ㄴ’ 발음을 할 때는 혀가 니은자로 굽죠. 글자와 발성 구조의 모양을 일치시킨 것입니다. 거기에 소리가 강해질 때마다 획을 하나씩 더합니다.
니은이 디귿이 되고 디귿이 티읕이 되는 것이 그런 원리예요. 모음은 천(·), 지(ㅡ), 인(ㅣ)의 원리로 만들었어요. 세 가지의 조합으로 모든 모음이 나오죠. 이 세 글자를 벗어나는 소리가 없어요. 이런 원리로 만들어진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글자가 총 1만 1,172자나 됩니다. 한글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자의 수가 가장 많은 문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제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 혹은 한글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은 한글이 옛날 창호지 문의 네모난 틀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고. 바로 그래서 한글박물관이 탄생한 것 아닐까?
최초의 한글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사실 한글보다 한자가 훨씬 많이 적혀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한글을 몰랐으니까. 해례본은 한글을 한자로 설명해 놓은 책이다. 후에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한 해설서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언해본이라 한다. 이 해례본의 원고는 세종대왕과 연구원들이 썼지만 실제 책에 글씨를 쓴 사람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다. 이 책에는 ‘슬기로운 사람이면 서너 시간, 머리가 나쁜 사람도 열흘이면 한글을 배울 수 있다’는 설명도 적혀 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이유는 해례본이 1446년 10월 9일경에 출판되었기 때문. 해례본 진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다양한 국가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
한글박물관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와 한글을 교육하고, 다양한 국가와의 국제협력을 통해 국내외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국내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어학당이 150여 개 대학에 있어요. 약 5만 명이 교육을 받고 있고요. 그 어학당들의 연합인 ‘한국어 교육 대표자 협의회’와 한글박물관이 2016년 MOU를 맺었어요. 외국인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한글박물관에 견학을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죠.”
교육에 한국 전통 춤과 음악, 음식 등 문화 요소를 버무려 더 재미있게 한국 문화와 한글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국제협력 활동도 활발하다. 2016년 한글박물관의 제안으로 ‘한중일 문자 박물관장 회의체’를 구성했다. 문자를 중심으로 한 전시, 연구, 교육 등 분야에서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향후 더 다양한 국가로 회의체의 규모를 넓힐 계획이다. 또 한글을 주제로 한 해외 기획전시도 한글박물관이 주력하는 사업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한글 디자인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어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훈민정음과 한글을 주제로 만든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해외에서 한글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한글에 대한 현지의 반응과 평가들을 다시 국내에 알리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세계 57개국에 있는 143개 한글학교에 대한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해외에서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글학교와 문화원을 지원하는 곳이 ‘세종학당’이고, 한글의 맞춤법을 만들고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리는 곳이 ‘국립국어원’이라면,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전파하는 곳입니다. 이 세 기관이 매달 한 번씩 회의를 하면서 서로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고, 한글을 더 잘 알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라온* 놀이터를 추구하는
신개념 박물관
한글박물관은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즐겁고 재미있는 장소로 대중에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상설전시와 별도로 매년 2~3회씩 열리는 기획전시다. 2016년 7월에는 ‘광고언어의 힘’ 전시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한글이 어떻게 압축적이고 창의적으로 의미 전달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9월엔 ‘1837년 어느 혼례날’ 전시를 통해 과거 여성들의 삶 속에서 쓰인 한글을 소개했다. 최신 IT 기술을 접목한 이벤트와 전시도 곧 공개된다. “요즘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세계적으로 유행이잖아요? 한글박물관 앞에 어린이 200명이 뛰어놀 수 있는 잔디밭이 있어요. 거기에서 포켓몬 고와 같은 방식으로 ‘한글 자모 찾기’ 게임을 할 수 있는 앱을 개발 중입니다. 찾은 자음과 모음으로 단어도 만들어 볼 수 있게 하고, 많이 찾은 어린이에게는 상도 주려고 해요. 또 박물관 3층에는 요즘 새롭게 뜬 가상현실 영상 기술인 VR(Virtual Reality)을 활용한 체험 전시실도 열 계획입니다.”
*라온: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
한글박물관 해설사 해설 프로그램 운영 시간
상설전시 | 매일 5회(10:00, 11:00, 14:00, 15:00, 16:00)
* 주말·공휴일·초등학교 방학기간 중 14:00
해설은 어린이 전용 해설로 진행
기획전시 | 전시 기간 중 매일 3회(11:00, 15:00, 17:00)
2017년 기획전시 일정
훈민정음과 한글 디자인 | 2월 28일~5월 28일
소리를 담은 글자, 한글 | 5월 10일~6월 2일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 | 4월 28일~9월 3일
한글박물관으로 떠난 작은 여행
해설사와 함께하면 박물관이
108배*는 더 재밌어진다.
이고훈 해설사와 함께한
한글박물관으로의 작은 여행.
*<훈민정음> 해례본을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 서문의 글자 수가 108자였다.
조선왕조가 가장 먼저 언해(한자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와 공덕을 기린 <월인석보>다. 우리가 잘 아는 ‘나라말 삼이…’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이 바로 이 책의 맨 앞에 실려 있다. 이 책의 글씨를 쓴 사람은 세조다. 아버지 세종을 대단히 사랑했던 세조가 훈민정음의 보급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정조가 4세 무렵 본인에게 작은 버선을 어린 사촌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 외숙모에게 쓴 것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 줄을 보면 ‘족건은 내게 적사오니 수대 신기옵소서’라고 쓰여 있는데, 당시 ‘족건’은 버선을 의미했고, ‘수대’는 외사촌의 이름이다. 이처럼 한글은 왕실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고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 보급되었다.
활자 기술이 발달하면서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시대 책 보다 크기가 작고 알록달록한 색깔이 마치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딱지본 소설’이라 불렸다. 또 당시 우동 한 그릇의 가격이 6전이었는데, 이 책의 가격도 6 전이어서 ‘육전 소설’이라고도 했다. <금수회의록>, <깔깔웃음 주머니>, <콩쥐팥쥐> 등 딱지본 소설은 한글 전파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당대 가장 인기 있었던 딱지본 소설은 <춘향전>으로, 조금씩 표지와 내용을 달리하며 100번 넘게 간행되었다.
처음 한글날의 이름은 ‘가갸날’이었다.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로 시작하는 데서 따온 것이다.
한글로 쓴 점술책이다. 2017년이 정유년이어서 정유생에 대한 점괘가 있는 페이지를 펼쳐 전시해 두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 만들어진 최초의 국정 국어 교과서다. 1948년 문교부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책이 편찬된 10월 5일이 교과서의 날로 지정되었다. 기존 국어 교과서가 한글 자모음의 모양과 이름순으로 한글을 가르쳤던 것과 달리, 이 책은 처음부터 문장과 이야기 속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이 교과서는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 ‘철수’와 ‘영희’로 아들, 딸의 이름을 짓고 ‘바둑이’로 강아지의 이름을 지었다고.
글 고서령 기자 사진 Photographer 유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