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게 묻다
간질간질한 계절, 정확히 어디쯤인지 몰라 한껏 설렐 수 있는 지금의 사이. 따스한 햇살은 봄이라는데 져버린 벚꽃 잎은 여름이란다. 봄과 여름의 그 사이를 묻고 싶어 대구의 자연을 찾았다.
서울역을 출발해 동대구역까지, KTX로 2시간이 소요된다. 잠을 청하면 개운까지 부족한, 졸음을 견디기엔 약간은 버거운 시간. 난생 첫 대구지만 도회적인 분위기가 익숙하다. 곧장 노트를 꺼냈다,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은 비슷하니까. 다시 들춰보진 않겠지만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도시를 우선 적고 보는 식이다.
곧 문제가 생긴다. 기록은 여행과 여행자 사이의 시차를 벌린다. 눈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휙휙, 지나가 버리는 것들을 쫓다 보면 금세 지쳐버리고 만다. 많은 이들이 도시의 휴일에 자연을 찾아 오르는 이유일 테다. 모든 것에 이유가 없는, 꽃이 피고 우거지면 물들었다가 져버리는 곳을 찾았다. 팔공산에 올라 지금 이 계절이 어디쯤인지, 나무에게 물었다.
대구의 북동쪽을 감싸 안고 있는 팔공산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서려있다. 팔공산이라는 이름을 두고 어떤 이는 ‘산의 규모가 워낙 커 총 8개의 군에 걸쳐 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왕건이 견훤과 동수전투를 벌였을 당시 총 8명의 공신을 이곳에서 잃어버려 팔공산이라고 부른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팔공산은 여러 왕조의 역사적 전설, 그리고 사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팔공산에서 무술을 연마했으며, 원효대사는 오도암에서 도를 닦았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는 동화사에 승병 사령부를 차리기도 했다.
팔공산에 위치한 절은 무려 20개에 달한다. 팔공산을 오르던 대구 시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한다. “팔공산은 보물이죠, 오죽하면 대구시청 전화 국번이 803이라니까!” 물론 사투리로. 팔공산에 서려 있는 수많은 이야기,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야기다.
당장의 자연은 여름으로 향하고 있는 나무, 그 나무가 만든 숲, 숲을 품은 산 같은 것들이다. 있는 힘껏 산을 들이마신다. 당장이라도 녹진한 초록빛으로 뒤덮일 것만 같은 숲과 산이 내게 불어온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곡선의 안식처, 불로동 고분공원
불로동은 ‘늙은 사람이 없는 동네’라는 의미다. 전쟁으로 인해 성인들은 모두 죽고 아이들만 남아 붙여진 이름이다. 아름다운 곡선은 전부 무덤이다. 일반적인 무덤 크기부터 높이가 10m에 달하는 고분까지. 모두 210여 기, 자료나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 돌로 지어졌으며, 돌방이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의 계통임을 추측할 수 있다. 모든 곳이 부드럽게 둥글고 시야가 탁 트여 산책하기 좋다. 무덤은 안식처였다.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불로동고분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산5
푸른 담쟁이 언덕
따뜻한 햇살,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문화를 곁들인 골목. 그날의 대구는 산책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다른 도시에 비해 현저히 피해가 적었던 대구는 덕분에 과거의 문화유산이 골목에 오롯이 보존되어 있다.
대구 중구는 이것들을 총 5개의 골목투어 프로그램으로 엮어 여행객들에게 선보인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 투어다.
근대문화골목 투어는 청라언덕을 시작으로 동산선교사주택, 3·1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제일교회 등을 거닐며 과거와 조우할 수 있다. 청라언덕은 대구출생의 작곡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언덕이다. 오르기 전, 한가득한 계단을 바라보며 허벅지를 실컷 주물렀다만 올라 보니 그 행동이 무색하다.
언덕 위에는 붉은 벽돌집이 자리한다. 동산의료원 초기에 파견되어 온 외국 선교사들이 살던 주택이다. 분지라는 특성상 덥기로 유명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 보려, 과거 이곳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담장에 담쟁이를 심었단다.
어린 담쟁이는 어른이 되며 언덕을 휘감았고 이곳은 푸른 담쟁이를 뜻하는 ‘청라(靑蘿)’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담쟁이가 가득한, 예전과 같은 모습은 볼 수 없다. 주택 보존을 이유로 담쟁이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청라언덕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버찌가 익어갈 무렵
톡, 버찌가 떨어진다. 데굴데굴, 옷깃을 타고 잘도 구른다. 흰 셔츠를 입는 게 아니었는데,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두류공원에 앉아 있을 때다. 버찌가 익어갈 무렵인데, 아직 따갑지 않은 봄 햇살 덕분에 잔디는 짙지 않았다. 큰 벚나무 아래, 빨간 돗자리를 톡톡 털어 펼쳤다. 팽팽 돌아가는 스프링클러 때문에 시야가 몽환적이다. 살짝 젖은 잔디밭에서는 흙냄새가 진동했고, 저 멀리서 달달 거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치킨의 향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류공원은 두류산과 금봉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구의 대표 공원이다. 이월드 83타워가 솟은 곳이 두류산, 문화예술회관 뒷산이 금봉산이다. ‘두류’라는 어감이 조금 낯설다.
두류산은 과거에 산이 둥근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두리산’이라고 불렸단다. 이후 지명이 한자화가 되며 두류산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 유니버시아드 테니스장, 두류수영장 등 볼거리는 많다만, 지금 중요한 건 앞에 놓인 치킨이다. 두류공원에서 치킨을 먹는다는 것, 그것은 대구의 모든 것과 같다. 마치 한강의 라면처럼.
대구가 치킨으로 유명한 이유는 간단하다. 맛있기 때문. 실제로 전국에서 인기를 끄는 치킨 프랜차이즈 대부분은 대구와 경북권에서 시작된 브랜드다. 교촌, 땅땅, 호식이두마리, 멕시카나, 처갓집 등 나열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닭다리를 들어 베어 무니, 버찌가 떨어졌고 닭가슴살을 내려놓으니 버찌가 떨어졌다. 하염없이 버찌를 가득 내려 주는 벚나무 밑, 달착지근하고 새콤한 대구를 실컷 맛봤다.
두류공원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36
글·사진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대구시, 대구관광뷰로 youtu.be/PauOfhZfo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