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북극, 볼리비아, 요르단…. 흔히 떠올리는 신혼여행지는 아닌 것 같아요.
[헌], [진] 결혼 전부터 둘 다 단순한 휴양이나 관광보다는 모험적인 여행을 좋아했어요. 현지 문화를 직접 겪어 보고, 낯선 곳에서 적응해 보는 그런 여행이요. 근데 사실 신혼여행은 수많은 콘셉트 중에 하나에요.
콘셉트요?
[헌], [진] 저희 여행의 주요 콘셉트라면 완전한 새로움, 가보지 않은, 문화적 이질감, 경이로운 경험 같은 건데 여기서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게 포인트에요. 낯선 곳을 여행한 사람들을 찾아보면 여행자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독특한 예술가나 여행가, 집을 팔거나 전세 값을 빼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아주 보통의 직장인도 특별한 곳을 여행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왜 하필 신혼여행이에요?
[헌], [진] 처음엔 너무나 소소하고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어요. 연애 4년차가 되었을 때 서로 결혼하자고 약속했지만 둘 다 사회 초년생이라 모아 둔 돈이 별로 없었죠. 그런데 웨딩촬영 비용을 알아보니 비용이 엄청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렴한 드레스를 하나 사서 함께 여행을 갈 때마다 웨딩촬영을 ‘미리’ 하기 시작했어요. 삼각대에 카메라를 놓고 이집트에서, 쿠바에서, 국내 여행지에서도 사진을 찍었어요. 덕분에 별도의 웨딩촬영 없이 결혼을 했고, 그때 그 추억들이 너무 좋아서 지금도 매년 여행을 다니며 웨딩사진을 찍고 있어요. 사진 속에 우리가 함께 변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요.
웨딩드레스를 매번 챙겨 가던데. 번거롭지 않아요?
[진] 오히려 그 반대에요. 그간 여행한 쿠바, 이집트, 모로코, 북극, 페루, 볼리비아, 요르단 같은 여행지들은 안락한 곳들이 아니었어요.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가 불편하니 배낭을 메게 되고, 그러다 보니 예쁜 옷을 많이 챙길 수가 없었죠. 웨딩드레스는 그런 점에서 그 어떤 여러 벌의 옷보다도 확실하게 예쁜 소품이에요. 요르단 사막의 모래바람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도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고…. 제가 아니라 남편이 말합니다(웃음).
웨딩사진이 해마다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아요.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했나요?
[헌] 관심이 있긴 했지만, 아내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어요. 이집트 여행 때만 해도 제대로 소위 ‘똑딱이’ 보급형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요. 사하라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사진으로 담기가 힘든 걸 경험한 후로 수동카메라를 사서 연습했어요.
주로 남편분이 찍어 주는 것 같던데요.
[헌] 네, 제 사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에요(웃음). 그래서 일단 아내를 많이 찍어서 베스트 컷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세팅된 카메라 설정을 그대로 두고 제가 그 자리에 가면 아내가 찍어 주죠. 그러고는 둘이 다 들어가는 구도로 카메라를 조정해서 리모콘을 이용해 사진을 찍어요. 그러니까 한 장소에서 3가지 촬영이 이뤄지는 거죠.
커플 스냅을 잘 찍는 노하우라도?
[헌], [진] 첫 번째는 준비물이에요. 그냥 예쁘게 찍으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보다는 소품이 있으면 좋아요. 저희에게 웨딩드레스처럼, 풍선이나 가랜드, 토퍼 같은 포인트가 되는 아이템들이요. 평범한 배경 속에서도 누군가가 ‘짜잔~’ 하고 분홍 풍선을 꺼낸다면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곤 해요.
두 번째는요?
[헌] 뻔뻔한 마음이요.^^ 전 세계 어딜 가든 우리만의 포즈로 사진을 찍으려면 얼굴에 약간의 철판을 깔아야 해요(웃음). [진] 쿠바에서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요르단에서는 사막 한가운데서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은 적도 있어요. 그럴 때 남자친구나 남편이 민망하지 않게 분위기를 잘 잡아 주면 좋겠죠?
웨딩드레스는 정말 어딜 가나 시선강탈이겠어요.
[헌], [진] 덕분에 얻는 게 많아요. 낯선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사하라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에게도, 안데스 산맥의 페루 원주민들에게도 신부는 축복의 대상이에요. 드레스를 입은 날은 자연스럽게 현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그들과 어울리며 여행을 즐길 수 있어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저희 부부에게 이보다 좋은 아이템도 없죠.
두 분 다 직장인이잖아요. 매년 장기휴가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헌] 예상하시겠지만 은행원의 휴가는 정말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장기휴가를 낼 때 엄청 눈총도 많이 받았죠. 아무리 업무를 미리 처리해 두고 공백의 손실을 최소화한다고 해도, 그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휴가를 길게 쓰는 행위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문화니까요. 그래도 여행을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정면 돌파하기로 했어요.
궁금합니다. 저 진지해요.
[헌]첫 여행지가 터키였는데, 때마침 경주시에서 터키 이스탄불과 협약을 맺어 ‘경주-이스탄불 엑스포’를 하더라고요. 은행에서는 엑스포에 맞춰 이스탄불 특판 적금 상품이 나왔어요. 그래서 해당 상품 안내장과 광고 포스터를 이스탄불에 챙겨 가서 홍보 사진을 찍어 와 회사에 제출했어요. 패기 있는 신입사원의 용기로 좋게 봐 주시더라고요. 그 이후 이집트에는 회사 마스코트를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가서 ‘세계를 누비는 마스코트 시리즈’로 사내 인트라넷 망에 올리고, 쿠바에 갈 때는 회사 로고가 찍힌 볼펜 1,000자루를 가져가서 현지 초등학교에 나눠 주고 그 경험을 직원들과 공유하는 이벤트를 열었어요.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성장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공유하다 보니 회사에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비법이긴 한데…. 따라하기엔 꽤 스케일이 큰데요?(웃음)
[진] 남편처럼 강력한 돌파(!)는 아니지만, 회사 내에서 여행자 이미지로 알려지는 게 도움이 된다는 데는 동감해요.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여행 정보를 공유하다 보니, 휴가를 다녀와도 마치 세미나 다녀온 사람에게처럼 후기를 묻더라고요. 다음엔 또 어딜 가냐고 저보다 더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물론 그럼에도 직장 다니며 휴가를 내기가 쉽지는 않죠. 여행 최소 3개월 전에는 회사에 미리 얘기해서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조정하고 있어요.
잊을 수 없는 여행지를 꼽는다면요?
[진] 볼리비아요. 한국에서 미국 LA, 페루 리마를 거쳐 간 여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우유니에 쏟아지는 별과 일출, 일몰의 몽환적이 모습이 그 힘든 기억을 깨끗하게 씻어 줬어요. 우주에 우리만 있는 느낌이었어요. [헌] 저는 매년 업데이트되는 편이에요(웃음). 쿠바를 갔을 땐 쿠바가 최고의 여행지였는데, 이듬해 모로코를 갔을 땐 또 모로코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고, 페루를 갔을 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감탄했죠.
그럼 다시 물을게요.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곳은?
[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요.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가공되지 않은 자연이 있는 곳이에요. 하루 종일 트레킹을 하다 보니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실크로드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건축물이 압권이었죠. 그리고 양고기는 세계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다음 여행지는 정해졌나요?
[헌], [진] 내년 초 이탈리아 로마를 갈 예정이에요. 저희 둘 다 대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다녀온 곳인데, 함께 가는 건 처음이에요. 의외의 선택인데요? [헌] 익숙한 곳으로 정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만난 지 10주년인 내년에 새로운 가족이 생길 예정입니다.^^ 해변에서 쉬기만 하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고, 그렇다고 원래 우리의 여행처럼 거친 곳을 가긴 힘들 것 같아서 난이도가 적당한 곳으로 정했어요.
축하드려요! 그럼 당분간 신혼여행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진]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에요. 아무래도 아이가 있으면 여행지 선정이 기존과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셋이서 하는 여행은 또 새로울 테니 기대되고 설레요. [헌] 태교 목적이 아니었다면, 원래 다음 여행지로 점찍어 둔 곳은 몽골과 아프리카였어요. 몽골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아프리카에서는 진짜 사파리, 세렝게티에 있는 동물들을 언젠가는 꼭 보고 싶어요. 둘보다 좋은 셋이서!
앞으로도 퇴사 생각은 없나요?
[헌], [진] 주위 사람들에게 저희의 여행 주제를 늘 ‘직장인이지만 세계여행’이라고 말해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죠. 그런데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여행이라면, 직장인이 세계여행자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 평생을 여행자로 살아갈 거라면, 굳이 회사를 그만두고 전세금을 빼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여행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직장 다니면서 계속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곳을 가 보려 해요.
여행을 최대한 길게 하기 위한 방법이군요.
[헌], [진]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이토록 좋아하는 여행이 인생의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 버리는 거예요. 1년간 여행을 다녀와서 그 뒤에 다음 여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삶이 되어 버리면, 그 현실이 너무 슬플 것 같거든요. 여행은 삶을 버티게 하는 꿈이고, 직장은 꿈을 이뤄 주는 삶이니까요. 꿈과 삶, 이 두 가지 모두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헌과 진은 둘 다 9년차 평범한 직장인이다. 헌은 은행원, 진은 통신사에서 교육 업무를 맡고 있다. 연애 초기였던 2011년 중국 칭다오를 시작으로 2015년 결혼 후 아시아, 중동, 남미, 유럽 등 지금껏 22여 개국 53개 도시를 여행했다. 물론 여전히 세계일주 중이다. 일명 ‘직장인이지만 세계여행’ 프로젝트, 준비물은 웨딩드레스. 인스타그램 travelaryman
글 김예지 기자 사진제공 유철헌, 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