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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Jan 09. 2020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대전

흑백 필터만 입혀도 근대의 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곳.

낭만을 운운할 수 있고, 시간을 추억할 수 있는 곳.

대전 원도심지는 최적의 위치다.


옛 충남도청의 입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오래 머물고 싶은 곳


근대 도시라 불리는 대전 원도심지. 그중에서도 영화·드라마 촬영지의 핫스폿이라 할 만큼 많은 작품에 조명을 받았던 곳을 찾아 나섰다. 그 첫걸음은 중구 보문로 205번 길에 위치한 ‘옛 충청남도 관사촌’이다. 적벽 돌담 사이로 경사진 골목길 초입에 들어서면 높게 솟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멋스럽게 길을 트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2층으로 지어진 파란 기와지붕의 적벽돌 외관을 두른 관사촌이 보인다.


굽이굽이 뻗은 노송 사이로 묵직한 권위가 느껴지는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 정원


이곳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마약왕>의 촬영지다. 하급 밀수업자였던 주인공 이두삼(송강호)이 마약 제조와 유통사업에 눈을 떠 성공 가도를 달릴 때 아내 성숙경(김소진)에게 차려준 ‘바로크 음악 학원’이 이곳 관사촌에서 촬영됐다. 그 스토리를 알고 관사촌 앞에 서보니 부유한 안락함이 느껴진다.

‘옛 충청남도 관사촌’은 충남도청의 준공과 함께 지어졌다. 2012년 충남도청을 홍성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남도지사는 이곳에 살았다. 이후 빈집이 된 관사촌을 대전시에서 매입해 연구 복원 작업을 한 후 비공개였던 도지사 공관을 포함한 10개 동을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기획해 시민의 힐링 산책로로 개관했다. 이곳의 새 이름은 ‘테미오래’다.


일본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2층 다다미 회의실



테미오래는 작은 산성 ‘테미’와 동네의 ‘골목 안 옹기종기 모여 사는 구역’이란 뜻의 순우리말 ‘오래’를 합성한 말로 시민 공모전을 통해 지어졌다. 일본식 양옥 형태로 지었다는 관사의 모습은 한국, 일본 그리고 서양식 건축의 절충 양식이 녹아있었다. 한국의 온돌식, 일본의 다다미와 장식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도코노마(床の間), 서양식의 아르데코 풍의 둥근 창이 그 시대 유행하는 모든 방식을 집약해 놓은 듯 각자의 멋을 뽐냈다. 무엇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정원이었다. 굽이굽이 뻗은 노송과 정원에 놓여있는 새하얀 가든 테이블, 직사각형의 높은 유리창과 그 안을 훤히 비추는 채광이 드리운 고즈넉한 툇마루. 이 모든 공간이 그 시절의 권위를 증명하는 듯 위풍당당했다.




신(新) 골목을 기워 입다


옛 정취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영화 <쎄시봉>, <택시 운전사>, <마약왕> 등이 이곳을 찾은 이유였는지 모른다. 깊고 따스한 골목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대전 동구 소제동에 도착했다. 소제동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곳으로 대전역이 경부선과 호남선을 개통한 후 교통의 요지가 되자 일본 철도공사 관료와 기술자, 노동자들이 투입되었고 철도 관계자들이 대거 거주하면서 철도 관사촌이 형성됐다. 그 당시에는 북, 남, 동관 사촌을 모두 합쳐 100여 채가 넘었는데 6.25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고 현재 소제동에 40여 채만 남아있다. 이 또한 도시재개발로 인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소제동이 아트의 마을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낙후된 소제동의 변화해 가는 신(新)카페 골목


60년이 넘도록 세월을 버티고 서서 그 시절의 시간을 기워 입은 대창이용원, 청양슈퍼, 지선미용타운이 있는 곳. 현재에 머물러 있는 투박한 옛 모습을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일명 소제동의 터줏대감들을 뒤로하고 과거와 현재를 기워 입고 새로운 모습을 연출하는 신(新) 골목을 찾아가 보았다. 이번 일정을 동행해 준 대전영상위원회 촬영지원 담당자가 그동안 눈여겨보았다던 소제동의 히든 공간 ‘풍뉴가’로 향했다. 이곳은 서울 종로 익선동 프로젝트로 도시재생 스타트 업체로서의 위상을 떨친 ‘익선다다’가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관사촌에 살던 할아버지가 몸이 불편해 밖을 나가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마당에 대나무를 하나, 둘 심다가 숲이 됐다는 이야기가 배어있는 공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길게 뻗은 대나무 길 포토 스폿 앞에서 사진 찍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붐빈다. 우리는 잠시 이곳에 머물러 예쁜 색감을 입은 ‘브랜딩 티’로 목을 축이기로 했다. 대전이 본가인 나에게 대전은 흔히 말하는 노(No)잼 도시였다. 그러나 등잔 밑은 어두웠고 이 도시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노우(Know)잼이다.

소제동 대나무 숲 포토 스폿 풍뉴가 정원
색감이 조화로운 블렌딩 티와 칵테일

Box. 세련미를 가미한 소제동 대나무 카페, 풍뉴가(風流家)

다양한 종류의 블렌딩 티와 칵테일을 색감으로 마시는 세련미가 있는 곳. 음악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대나무 숲길이 울창한 포토 스폿이 있는 힙한 카페.


대전 동구 소제동 299 73

매일 11:00-11:30

무궁화차 7000원 사계절 차 8000원 애플티 칵테일 9000원

070 4107 1111


글 박수진




근대 건축양식, 도플갱어를 만나다


외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전에 있는 옛 충남도청 말이다. 일본 도야마현(富山県)청과 똑 닮아있다. 나는 일본 신문기자로 도야마에서 2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현청 담당 기자였기 때문에 회사보다 현청 기자실에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 익숙한 장소를 대전에서 만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치형 복도 입구의 형태도 비슷하다. 도야마에서 지낸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일본 도야마현청과 닮은 옛 충남도청의 내·외관

최근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면 ‘대전에서 촬영하는 일이 많아졌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 52시간 근무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동 시간도 근무시간에 포함되어 서울에서 먼 지방으로 촬영가는 건 쉽지가 않다. 그에 비해 대전은 합리적인 거리에 있고 국내 최대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근대 건축물이 많아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라는 것이다. 영화 <변호인>이나 <더 킹>, 드라마 <미스터션사인> 등 많은 작품의 촬영지 메카로 옛 충남도청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변호인>에서는 법원으로 등장했다. 이곳 계단을 보니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송강호)가 신문기자(이성민)를 만난 장면이 떠오른다. 법정에서 송 변호사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라고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을 주장하며 목청을 높이는 장면은 몇 번이나 되돌려볼 만큼 나의 최애 장면이다. 이날은 대전영상위원회 촬영지원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촬영지를 돌았는데 며칠 후 한국에 놀러 온 남편과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다. 오사카부(大阪府) 직원이었던 남편은 ‘오사카부청하고도 닮았다’라고 했다.


옛 충남도청은 ‘대전 근현대사전시관’으로 역사를 지키고 있다


옛 충남도청은 1932년에 지어졌다. 그전까지 도청은 공주에 있었는데 1905년 대전역이 생기면서 교통의 요충으로 발전한 대전에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일본 도야마현청은 1935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은 청사라고 할 수 있다. 대전 시장 접견실로 이용하는 2층의 한 공간. 테라스와 연결된 문밖을 나서니 대전역까지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청이 만들어진 1932년 당시 도지사는 일본인이었다. 여기서 대전을 내다봤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옛 충남도청은 80년 동안 사용된 다음 2012년 도청이 홍성군으로 이전하면서 도청의 역할은 끝났다. 지금은‘대전 근현대사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덕혜옹주’를 닮은 선교사촌


한남대학교 선교사촌에서 촬영한 영화 <덕혜옹주>는 주로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다. ‘덕혜옹주’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허진호 감독’에게 처음 들었다. 장동건 주연 영화 <위험한 관계>가 일본에서 개봉할 당시 ‘허진호 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다음 작품에 대해 물어봤더니 ‘덕혜옹주에 관한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답했다. 낯선 이름인지라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찾아보니 일제 강점기의 희생자였다.


붉은 벽돌과 한식 지붕. 동서양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숲속의 선교사촌

영화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황녀이기 전에 ‘조국과 부모님을 그리워했던 한 여성’으로 보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죽은 고종. 독살설도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강제적으로 유학 가게 되면서 어머니와도 떨어지게 됐다. 덕혜옹주가 만년에 조국에 돌아와 남긴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직필의 글이 영화 엔딩에 나왔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1950년대 시대상이 반영된 영화 '덕혜옹주' 촬영지


일제 강점기는 근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들은 서양의 문화가 들어온 상징으로 보지만, 한국에서는 단순히 서양식이 아닌 ’일제‘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 건물이다. 그런데 <덕혜옹주> 촬영지인 선교사촌 건물은 일본이 아닌 한국과 서양의 융합으로 보였다. 붉은 벽돌에 한식 지붕. 알아보니까 역시 해방 후 1950년대에 지은 건물이었다. 당시 대전에서 활동했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이다.



<덕혜옹주>에서는 양장의 어린 덕혜옹주(김소현)가 차에서 내려 어린이들과 만나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 친일파 한택수(윤제문)가 미리 보낸 기모노를 입지 않고 ‘대한제국의 옹주’임을 보여준 장면이다. 양장의 옹주와 서양과 한국의 융합인 선교사촌 건물은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사실 <덕혜옹주> 뿐만 아니라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드라마 <마더> 등도 촬영했다. 대학 안에 있지만 숲속으로 한참 들어가야 해서 온전히 그 스토리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대전에 이런 매력적인 곳들이 숨어 있었는지 몰랐다. 하루 동안 대전을 돌아보며 영화 촬영지를 찾아 스토리를 기억하는 이 기행이 너무도 영화같이 느껴졌다.     


글 나리카와 아야


두 기자의 한·일 민간교류 프로젝트

‘도코이쿠(어디 가)?’


한국에 살면서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현재 <중앙일보>, <아사히신문>에 활발히 기고하고 있는 나리카와 아야 기자와 일본외식기업과 <월간식당>을 거쳐 한국과 일본의 음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푸드라이터로 활동 중인 박수진 기자. ‘제멋대로한국홍보과(勝手に韓??報課)’라는 이름으로 의기투합한 이들은 2020년 2월부터 일본 지자체 47개 도도부현을 모두 순회하며 한국 지역의 매력을 홍보하는 설명회 ‘도코이쿠(어디 가)?’를 개최할 예정이다. 지금은 대한민국 곳곳을 여행하며 이야기를 수집 중이다. 인스타그램 dokoiku_




글·사진 나리카와 아야, 박수진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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