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권정생 작가는 소설 <몽실 언니>의 머리말에서 폭력과 인생의 관계를 이렇듯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몽실 언니>라는 작품은 결국 이 한 문장에 응축된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몽실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렇듯 아주 조그마한 불행에도 그 이면을 살펴보면 커다란 원인이 존재한다. 전쟁은 몽실을 어른으로 만들었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라며 울부짖는 몽실은 자신이 겪은 불행을 통해 핍박받는 타인을 포용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분단 시대 초기에 벌어진 겨레의 비극은 이 땅에 수많은 몽실을 잉태시켰다. 이념 갈등이 유발한 폭력의 피해자인 작품 속 아비들은 또 각자의 가정에서 폭력의 원흉이자 가해자로 그려지고 있다. 세상과 어른들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굳세게 ‘난남이’를 지켜내는 몽실의 유년에서 우리 겨레가 나아가야 할 길이 드러난다. 6‧25 전쟁이라는 성난 파도는 연약한 소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몽실은 더 연약한 존재를 끌어안은 채 정면으로 물살을 견뎌낸다. 그렇게 지켜낸 난남이가 비록 병든 환자로 살게 되는 밝지 않은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기운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언니가 참 좋아서, 엄마가 날 낳아 준 것이 고맙다”는 난남이의 몇 마디 말 덕분일 것이다. 새아버지의 폭력으로 갖게 된 절름발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몽실의 마지막 뒷모습은 불행한 여성이 아닌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영웅을 상징하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이 소설은 그래서, 단지 분단의 아픔을 먹먹하게 그려냈다는 의미를 넘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태도, 그러한 인생길과 겨레의 길을 제시하는 큰 울림으로 독자의 마음에 각인되는 작품이다. 뒤란 담 밑에 모아둔 소꿉 살림을 바리바리 싸들고 엄마를 따라나선 어린 몽실이 중년의 모습으로 황톳길 산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순간까지 우리는 잠시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