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는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소개하면서 주목받은 책입니다. 현재도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죠. 일단 이 책의 제목은 원제와 느낌이 좀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책들은 'OO 세계사'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책들은 원제를 따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금의 세계사> 같은 책의 원제는 <Daylight Robbery>입니다. 우리말로 의역하면 '눈뜨고 코 베어 간다' 같은 말이 될 수 있겠죠. 그럼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의 원제는 뭘까요? <Culture:The Story of us, From Cave Art To K-Pop>입니다. K-Pop이 등장한다는 것이 반갑죠.
원제에 나와 있듯 이 책은 Cave Art, 즉 동굴 벽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무려 3만 5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쇼베의 동굴로 안내하죠. 아래의 영상에 보이듯 이 동굴에는 3만 5천 년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인간이 그려온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제대로 된 언어도 된 없었을 당시의 인간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요?
단순히 생각하면 무언가를 그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볼 수도 있고, 교육의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냥의 대상, 또는 위험한 동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일 수 있죠. 지금의 '이불 밖' 보다 그때의 '동굴 밖'은 100배, 1000배는 더 위험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하고 공감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동물을 그린 이유는 그중에서 가장 공감되는 소재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문화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이야기하는데요. 첫 번째 관점은 어떠한 집단이 공통의 풍습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우리와 외부를 구분할 수 있는 배타적인 특징이 셈이죠. 또 다른 관점은 문화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한데, 동떨어진 먼 과거(예를 들면 그리스 문헌들을 번역한 아랍의 학자들), 또는 먼 지역(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 인도 현장법사)에서 문화가 연결되는 예시를 제시하고 있죠.
이 둘은 다른 이야기 같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굴벽화부터 K-Pop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영감에서 시작해 다수의 공감으로 이어지게 되죠. 바로 이것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다른 동물들과 특정한 관계에 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과 사는 무엇이고 기원과 종말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째서 우주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할 능력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지식 노하우know-how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know-why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
스티브 잡스가 인문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도 인문학 열풍이 강하게 불었지만 '왜 인문학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고민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인문(Liberal Arts)이 중요해진 이유는,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기술(Technology)이 차지하던 비중이 점차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인문은 Know-Why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문화, 인문의 영역이 중요해진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공감을 일으키고 전파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수많은 청중(곧 잠재적 소비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마법을 체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애플에서 새로운 제품이라도 발표할 때면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받을 때 어린아이 표정 같은 청중들을 만날 수 있죠.
잡스와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저도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수많은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요. 가장 성공한 프리젠테이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아닙니다.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광고주들이 어떤 아이디어에 반응해서 프리젠테이션을 중단하고 토론을 하게 되는 상황이죠. 뭔가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겁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를 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영감이 다른 사람들에게 파장을 일으키는 거죠. 도킨스는 모든 생명체들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생존 기계'라는 관점을 갖고 있지만 그중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유전자 외에 또 다른 자기 복제자, 즉 MEME에 의해 문화를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금 MEME이라고 하면 '짤'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지만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복제되어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킨스는 '유전자' 외에 유일한 '자기 복제자'라고 설명하고 있죠.
만약 우리가 문화, 또는 인문학을 교양이나 즐거움을 위해 선택한다면.. 즉 수용자(Reciever)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관계없겠지만, 사회적으로 좀 더 가치 있는 발신자(Sender)의 위치에 서고 싶다면 그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MEME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MEME를 표현하려면 기술이 중요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원부터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하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악보를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제 그런 기술은 기술로 대체됩니다. 우리는 AI나 각종 자동화 솔루션을 통해 키워드 하나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영상도 만들 수 있게 됐으니까요. (커버의 동굴벽화 그림도 챗GPT로 그렸습니다)
사이먼 시넥은 골든 서클을 통해 Why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참고 영상) 일반적으로 우리는 결과물 중심의 What에서 출발하지만, 위대한 혁신가는 Why, 왜 이 일을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죠. 저는 이 개념이 원자의 구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원자는 가운데 원자핵(양성자와 중성자)이 있고, 전자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에서 실제의 전자는 구름과 같은 모양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대체로 위와 같은 그림이 여전히 쓰이고 있죠. 사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구조가 아닌 크기입니다. 만약 원자를 축구장 크기라고 하면 원자핵은 한가운데 놓인 구슬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슷한 비유는 태양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요. 골든 서클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면 Why는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와 같습니다.
상대적 크기를 고려한 태양계 그림에서, 지구를 팥알 정도로 나타낸다면 목성은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명왕성은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야 한다(더욱이 명왕성은 세균 정도의 크기로 표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켄타우루스를 그런 그림에 나타내려면 1만 6,000킬로미터 바깥에 표시되어야만 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우리(즉 마케터)는 인간이 오래전부터 문화, 예술을 즐겨 왔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보다, 인간들이 그림이나 관념에 반응하고 전파했을까에 집중해야 합니다. 거대한 문화나, 엄청나게 성공한 캠페인 등도 그 핵심인 Why(컨셉, 영감, 인사이트 등)는 마치 원자에서의 원자핵과 같이 아주 작은 요소로 만들어져 있죠. 그리고 시대에 따라 어떤 요소가 대중에게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도 달라집니다.
여기에 우리가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작은 Why를 찾기 위해,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또 토론을 하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