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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Jun 28. 2021

중동은 왜 싸우는가?

제국주의의 이기적 욕망이 남긴 비극.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과연 있을까? 우리 역시 이념적으로, 지역으로, 그리고 또 세대와 계층으로 나뉘어 충돌한다. 그렇지만 한국 전쟁을 제외하면 몇 백 년 간 우리끼리 서로 죽자고 싸우는 일은 없었다. (한국전쟁도 따지고 보면 우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일어난 대리전에 가깝지만..)  


우리는 '헬조선'이나 '이게 나라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같은 말을 쉽게 하는데, 어찌 보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바라보는 반증이 아닐까도 싶기도 하다. 중동이나 아프리카 내전의 참담함을 보면, 또 나에게 시간을 묻던 사람이 내 지갑을 훔쳐 도망가거나, 갑자기 내 머리에 총을 겨누지 않을까 걱정(또는 현실) 해야 하는 곳들을 겪어 보면.. 우리 만큼 일상 평온함을 누리고 사는 곳도 흔치 않으니까. 마이클 샌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더 정의롭지 못한 곳에 살아서가 아니라, 정의의 기준  자체가 높거나 민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싸우는가를 궁금해 하지만, '사피엔스'의 장구한 역사 속에 '내일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을 던 게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하면 사치에 가깝다. '평화'라던가 '평범한 삶' 같은 것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렇다고 죽고 죽이는 그런 야만의 세계가 당연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그들의 피상적인 면들만을 보고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을까를 새겨 보고 싶을 뿐이다.


중동에 대한 내 관심은 영화에서 시작됐다. 예전부터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이나, 걸프전 등 뉴스나 영화 속에서의 보여지는 중동은 가본 적도 가볼 일도 없는 먼 세상이었다. 뉴스에서 아무리 생생하게 보도를 해줘도 화려한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에게’나 ‘그을린 사랑’ 등의 영화를 보면 그곳에서 태어난 죄 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이 전달된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싸워야만 하는 걸까? 무엇이 그렇게까지 상대를 인정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우리가 지금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이미지는 사막과 석유, 그리고 테러와 이슬람이다. 몇 천년을 떠돌다가 나라를 만들어서 입주한 이스라엘을 제외한다면 대개 그들은 '아랍*'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그곳은 역사적으로 꽤 오랫동안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땅이었고, 상당 부분 비잔틴에 속했으며, 그 뒤엔 투르크(지금의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들 중 누구도 '아랍'이 아니다.)

* 아랍은 언어적 지리적 특성으로 묶이지만, 아랍어를 쓰는 문화권이라 보면 큰 무리가 없다. 그에 비해 이슬람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다. 꾸란은 아랍어로만 쓰고 읽게 되어 있으므로 이슬람과 아랍은 대개 하나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지금의 중동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제국주의 국가 간 땅따먹기의 산물이다. 영국은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아라비아의 로렌스 참고)했고, 1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약속했으며, 이슬람을 견제하기 위해 아랍 내의 기독교 세력들을 지원했다. 특히나 석탄에서 석유로 주 에너지원이 바뀌어 가는 과정 속에 중동은 욕망의 각축장이 되어 갔다.


그 결과 불행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국가 간의 전쟁 (주로 종교적 이유로), 국가에 의한 소수민족의 탄압 (쿠르드족이나 팔레스타인의 경우), 내전(주로 계파나 독재의 문제), 테러(중동에 불행의 씨앗을 뿌려 놓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공통점이라면 제국주의에 철저히 농락당한 이들은 대체로 서구화를 경멸하며, 근본주의적 과격함만 남게 된다.


젊은 이슬람 신학자 와하브의 눈에는 이런 모든 행위들이 거슬렸다. 오직 알라만 경배할 것과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 것을 명한 <꾸란>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된 다신교 문화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이슬람 최우선 교리를 좀먹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설파했다.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오직 <꾸란>과 <하디스>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바꾸자!"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우리가 불과 한 세기 전에 경험해본 대로.. 이러한 종교와 이념적 과격함은 '인간성'을 상실케 한다. 어느새 잊혀진 그곳의 사람들은 어디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




정의는 어디에 있을까?


분쟁 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유엔을 뭘 하고 있나?'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은 왜 개입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 때론 분노까지 느끼곤 한다. 중동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홍콩이나, 미얀마 시태를 봐도 과연 정의는 승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국제적 문제에 허울뿐인 '정의'나마 등장한 것은 아마도 100년이 채 되지 않을 듯하다. 그것도 권력이 스스로 정의로워져서가 아니라, '도덕적 개인'이 '비도덕적 권력'을 축출할 수(도)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권력은 한 번도 대중의 눈치를 본 적이 없으며, 다른 나라에 개입을 하는 것도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일 뿐 정의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우리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여겼던 (또는 그렇게 배웠던) 사례 중 지금까지 동일하게 평가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개개의 인간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며, 또한 때에 따라서는 행위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더욱 존중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moral)이다. (중략) 집단의 도덕이 이처럼 개인의 도덕에 비해 열등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자연적 충동들-사회는 이 자연적 충동들에 의해 응집력을 갖는다-에 버금갈 만한 합리적인 사회 세력을 형성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며, 이는 오직 개인들의 이기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주의(group egoism)의 표출이기도 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문제가 낙관적인 해결은 맞기는 난망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권력'이 조금이나마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개인'의 힘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개인들이 이성의 시대를 만들 수 있을 때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원래 평소 궁금했던 중동 지역 각 나라의 역사나 분쟁의 배경 등을 정리해보려 했으나, 글을 쓰면서 그런 '지식'들이 과연 큰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젠 뭐가 원인이고 결과인지가 헷갈리는 상황이 됐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은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종교적 믿음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지금의 중동이 그렇게 된 데는 그리 오랜 역사가 있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잘못의 원인은 대부분 그들에 내부에 있지도 않다. 우리가 가진 오해와 편견을 조금 걷어낼 수 있다면, 그게 이해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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