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앞 날은 디스토피아 영화보다 어둡다.
'현실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격언은 대부분 가혹한 현실을 비추는 데 사용된다. 인류 종말의 시나리오들도 그렇다면 어떨까? 블록버스터 영화 스토리 중 많은 작품들이 인류의 존망을 가르는 재난이나 디스토피아 등의 세계관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절멸 시나리오들은 대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 지루하면서도 더 큰 고통을 선사할 경우의 미래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인간 수준을 아득히 능가하는 만능 인공지능이 인간의 가치관을 벗어나는 시나리오를 떠올려보자.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 <아이로봇>, <메트릭스> 등의 로봇에게 지배받는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비유하자면 대성한 신생 it 기업이 굳이 제조업에 발을 들이는 꼴이다.
인공지능에게는 훨씬 따분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웹 상의 인간 사용자로 위장해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건 기본이다. 금융기관을 해킹해 얻은 돈으로 테러리스트를 고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재자 개인에게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수도 있다. 평범한 인간 한 명이 떠올릴 수 있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고 효과적인 방법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인류가 자멸하는 사이 인공지능은 더 높은 성능의 인공지능을 개발한다. 이런 과정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인류는 개미를 학살하지 않는다. 그래 봤자 귀찮기만 하고 좋을 게 없어서 그렇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은 단순히 심심하거나 재미있어서 개미굴에 물을 채우고 볼록렌즈로 개미를 태워 죽인다. 인류와 인공지능의 관계가 그럴 것이다. 심심하거나 재미있어서, 잘못 밟아서. '어 죽었네? 미안.'
더 암울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이런 예측 가능한 미래를 막기 위해 현재 인류가 투입하는 금액은 인류가 아이스크림 사 먹는데 쓰는 돈보다 적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류가 이따 먹을 간식보다 인류 존재 위협에 관심이 적다는 정량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더 더 암울하게도 예측이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훨씬 많다는 점이다. 10여 년 전, 스마트폰을 처음 쓰고 카카오톡을 설치했던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모티콘을 구독할 줄 알았을까?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인공지능은 어떤 솔루션을 떠올릴까? 아니, 인공지능만 문제인가? 냉전 시대를 지난 후 거듭된 증언을 바탕으로, 현 지구에 변변한 핵전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건 기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뿐인가. 환경파괴는? 소행성 충돌은? 인공 전염병은?
그러나 '현실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라는 격언은 부정적 상황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인류는 생각보다 더 쉽고 빠르게 이런 위험들을 타개할 수도 있다. 인류에겐 시간이 없지만 아주 없지도 않다. 급하고 중요한 위험들부터 처리하기로 선택하고 집중하면 훨씬 많은 시간과 자원을 아낄 수 있다. 이렇게 벌어낸 시간에 범지구적인 단체를 조직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율 과정을 통해 기술개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도 있다. 또, 다가올 위협을 더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할 수도 있다.
장기적이라는 말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시간은 사실 희소자원이 아니다. 종의 관점에서 천년, 만년은 짧디 짧은 순간이다. 지금부터 전 인류가 모든 오염을 멈추면 10만 년 안에 모든 지구에 가한 데미지는 자연적으로 모두 회복되고 이는 인류의 노력에 따라 획기적으로 짧아질 수 있다. 태양계가 우주의 작은 점도 안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력하게도 만들지만, 그만큼 가능성을 펼칠 공간이 무한하다는 뜻도 된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이 불의가 없는 사회일까? 그건 필수적인 요소이지 절대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잠재력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인류는 놀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놀랄 만큼 지구를 파괴했지만 이를 만회할 힘도 있다. 인류는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막고 미래로 도약할 힘도 가지고 있다. 세상엔 절대 해결 못할 것 같은 문제들이 많지만, 그것들을 모조리 해결한 게 우리가 현재 사는 세상이다. 우리는 장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으며 침착하게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며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범용적인 지혜다.
inspired by <사피엔스의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