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큐온 10기 후기: 여기까지 왔고 어디까지 갈지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아침에 스트레칭과 명상하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는데 요즘 게을리했다. 오늘은 해야겠다 싶은 죄책감에도 침대의 끌림에 쉽지는 않다. 어기어기적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하자마자 15분 늦게 맞춘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스트레칭과 명상을 마치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친다.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지각은 면하겠다. 버스를 타고 뉴스 요약 서비스에서 보낸 메일을 읽다 전철에 환승하고 책을 편다. 씽큐온 10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3개월간 5권의 책을 읽고 5편의 글을 썼다. 씽큐온은 이제 11기 모집도 완료됐지만 내 삶은 별 변화가 없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삶은 흐른다. 당장의 쾌락을 포기하고 기울기를 키우는 삶을 택한 것에 허무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이런다고 팔자가 고쳐질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도 답이 없다. 세상 탓하고 남 탓하며 싸구려 쾌락에 취해봤자 술 깨면 더 큰 불행이 기다릴 뿐이다. 살던 데로 좆밥처럼 살 건지 좆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을 살 건지. 근데 사실 세상 사람 80%는 좆밥이다. 우리가 돈이 있냐 빽이 있냐. 우리 좆밥네들은 그냥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그 선택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던 스마트 스토어를 시작하는 것이던 선택지는 많다. 사실 좆밥에서 탈출하기를 등 떠밀 리지 않고 선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자책이 평생을 좀먹는다.
변화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독서를 시작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느끼고 움직인 지 벌써 2년 반이 넘었다. 80권 정도의 책을 펼쳐 58권의 책을 완독 했고 절반 정도의 서평을 작성했다. 많이 읽었다고 할만한 숫자도 아니고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지도 않다. 좆밥이라는 단어의 찰기보다 훨씬 자극 없는 변화의 속도로 움직인다. 그래도 이젠 서울 땅에 발 붙이고 당분간은 문제없이 살 정도는 됐다. 좋은 회사의 좋은 동료들과 일하게 되었으나 운이 좋았고 운은 운일뿐이다. 그러나 더 큰 운을 잡기 위해 기울기를 키우면 키웠지 기울기를 숙일 일은 없다. 씽큐온을 통해 변화는 확실히 생겼다. 리벤지에 성공한 기념으로 그간 변화를 기록하려 한다.
18개월 전 나는 씽큐 5기에 지원했다. 코로나로 인해 시작된 최초의 전면 씽큐 온으로 굉장히 기념비적인 기수였다. 하지만 내 주변 상황의 변화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1권밖에 못했는데..' 하며 자책감도 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진로 고민을 끝내고 취업까지 끝마쳤다. 때가 되었고 씽큐온에 돌아왔다. 씽큐온의 틀은 그대로지만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다행히 나도 많이 바뀌었다.
읽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 정확히는 독해에 공을 들이는 완급조절에 관함이다. 속독이 뻥이란 건 이제 다들 아실 거다. 현실에 존재하는 속독은 '아는 내용을 만난 순간'뿐이다. 이미 봤던 영상의 재방송을 또 보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아는 내용이라 빨리 봐도 이해에 문제가 없는데 속도 조절이 안되니 벌어지는 현상이다. 반면에 글의 재생속도는 본인의 눈이 결정하기 때문에 아는 내용을 보면 3배속 5배속으로 호로록 넘어가는 게 가능하다. 물론 씽큐온에서의 나도 이 경우는 아니었다. 친숙하지 않은 분야의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속독 밑의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싶은데, 작명 센스가 발동 안되니 한 획을 빼서 슥독이라고 하겠다. 사실 이해가 안될만한 책의 이해가 될 리 없는 문장을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이해가 되진 않는다. 그럴 땐 슥슥 보다가 넘어간다. 수학 시험 꿀팁처럼 모르는 건 넘어가고 될만한 것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시험처럼 대놓고 시간제한이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삶에서 시간은 한정적이니 타당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퍼즐 몇 조각을 놓친다고 큰 그림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완독 한 후에 후루룩 1.5 회독으로 훑어보면 빼먹은 퍼즐 몇 조각의 그림이 좀 더 잘 보이기 마련이다. 퍼즐 조각을 많이 놓쳤어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았다. 1.5 회독을 넘어 2 회독 3 회독이 있으니 완벽한 이해가 안 된다고 너무 힘 빼고 절망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둘째로 글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난 어릴 때부터 워낙 공예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을 많이 해서 내 손으로 빚는 모든 것들에 장인정신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래서 서평을 쓸 때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끝없이 덧붙이고 갈아내는 작업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우리 회사가 워라벨 쩌는 직장에 내가 주말 약속 없는 찐따여도 씽큐온과 장인정신은 공존하기 힘들었다. 첫 번째 책 <초생산성>은 책도 쉽고 상대적으로 시간도 많아서 장인정신을 유지하며 힘들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책 <최악을 극복하는 힘>은 이름처럼(?) 난이도가 최악인 어려운 벽돌 책이었고, 데드라인 앞에서 장인정신이 희박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글의 스케치 정도만 떠오르면 스케치의 핵심 아이디어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글을 다듬는다. 그렇게 나온 글들이 장인정신의 산물들보다 비교적 더 부끄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확연히 대단한 걸작도 아니었다. 오늘 끌어낼 수 있는 극상의 아웃풋이 성장한 내년의 내가 평균적으로 내는 아웃풋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하얗게 불태우기보다 점진적으로 안정적으로 평균값을 늘리는 게 수지 남는 장사라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e-book에 입문했는데, 다시 종이책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 필기도구 없이 책을 못 읽는 분들이 과거의 나처럼 망설이실 텐데, 그럼 더 자신 있게 아이패드를 지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책에 곧바로 기록하지는 못하지만 수많은 메모 어플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앱을 전환해가며 기록하고 읽는 게 약간은 산통 깨는 작업방식이긴 하나 ctrl+c, v, f(복사, 붙여넣기, 검색)과 맞바꾸는 건 엄청난 생산성 향상의 이득이 있었다. 또 필기구를 두고 책만 챙기거나, 책을 바꿔가며 읽고 싶은데 많이 챙기기는 힘들다는 물리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서를 각 잡고 처음 시작했을 땐 한 권 읽을 시간에 서너 권의 책을 구매했다. 책을 대여섯 권 살 즘이면 관심사가 바뀌었다. 그렇게 지금 책장에 쌓아 놓은 책의 절반도 읽지 못했다. 저 악성 재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악성 재고가 될만한 책을 충동구매하지는 않지만 물리적 공간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점은 현실적인 미니멀리스트인 나로서 너무나 큰 장점이다. 자녀교육에 최고의 인테리어는 책장이라지만 난 27살이니 이건 나중에 고민하도록 하자. 물론 물리적 실체가 주는 일종의 포만감(택배 받을 때의 그것) 같은 게 있지만 내게는 합리성이 비교적 떨어진다고 느껴진다.
세 가지 깨달음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포기하거나 내려놓는, 비우는 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내려놓고 포기했는데 공부 효율과 행복, 재미는 더 높아졌다. 이건 아마 도지 머스크의 돈 복사 버그보다 쩐다. 사실 이번 씽큐가 끝나도 내게 생긴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글로 쓰니 3개월간의 변화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변화가 기대된다. 씽큐 11기와 그 이후의 모든 분들. 특히 완주에 실패해 낙담하는 분들이 화려한 리벤지에 성공해 나처럼 높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