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 싶은데...
"할머니한테 기도 좀 해드려.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정엄마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못 드시고 누워있는 할머니를 장남과 큰며느리인 나의 친정 부모님은 서로 교대하며 밤낮으로 당신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인 나의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퇴근하는 남편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친정에 다녀왔다. 가장 큰 목소리로 "할머니! 나왔어! 많이 보고 싶었지!" 최대한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이며 눈물을 흘리셨다. "바빠서 어떻게 왔냐." 하시며 반겨주셨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거친 할머니의 숨소리에서 반가움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울음을 참으며 "할머니! 내가 일요일에 애들 다 데리고 올 거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요! 알았지! 꼭! 증손주들 다 봐야지!" 하면서 할머니 얼굴을 쓰다듬었다. 옆에 있던 남편도 "할머니! 저희 애들 데리고 올게요. 조금만 힘내세요." 하며 할머니에게 마지막이 되어버린 한마디를 남겼다. "하... 엄마... 내가 할머니한테 대세를 드릴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한불자전≫에서는 사적 세례(私的洗禮, bapteme prive) 혹은 약식세례(略式洗禮, ondoiement)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대세란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사제를 대신하여 예식(禮式)을 생략하고 영세를 베푸는 것으로 비상세례라고도 한다. 이때 세례를 베푸는 자가 생수(生水)로 세례자를 씻기고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함으로써 세례의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대세는 정식으로 세례의 집행이 불가능할 경우, 즉 전쟁이나 박해로 인해 세례성사의 집행자인 사제가 없을 경우나 사제를 불러올 동안에 세례 받을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집행되어야 한다. 대세에는 임종대세와 조건대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해시대에 사제 부재로 인해 평신도에 의한 대세가 많이 시행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오는 길에 엄마에게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했다. 가톨릭 신자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나와 엄마였기에 할머니의 마지막에 더 많은 기도로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세가 생각났다. 가톨릭에서는 임종이 다가온 이들에게 대세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친정아빠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에 큰손녀인 내 마음대로 할머니에게 대세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연년생으로 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더 많이 키워졌다. 할머니가 매일 새벽에 집 근처에 있었던 큰 나무밑에 앉아서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집에서 교회까지 거리가 멀어서 다니기 힘들었던 할머니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간절히 "지켜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했던 할머니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새벽공기와 함께 섞여 내게도 전해졌었다. 할머니는 농사짓는 장손과 결혼해서 4남매를 낳고 평생을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사셨다. 항상 가족들을 걱정하고 약한 몸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며 가족들을 이해해 주셨던 분이셨다.
할머니는 8명의 증손주가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까지 보셨고 올해 큰 증손녀 안젤라의 대학교 합격소식까지 들으셨으니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용돈을 안젤라에게 주셨던 모습은 안젤라가 기억하는 외증조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아빠랑 의논해 봤는데, 할머니께 대세 드리기로 했어. 엄마가 성당에서 견진성사까지 받았고 자격 있으니까 할머니한테 대세 드릴게. 어떻게 하는지 전에 배워서 알고 있어. 대세 드리고 성당에 연락해야겠지?" 이럴 수가!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친정아빠와 할머니의 요양보호사가 증인이 되어 나의 할머니는 도미니카로 세례를 받으셨다. 눈을 깜박이며 엄마의 질문에 응답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성당에서 할머니의 대세 소식을 들은 신부님께서는 최도미니카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다정한 말씀도 해주셨다. 친정엄마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좋았던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성가도 불러드리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새 할머니 곁을 지키던 아빠와 교대할 때 아빠의 퉁퉁 부어있는 눈을 보며 마음이하루하루 할머니는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다해가고 있었다. 나는 매일 전화해서 할머니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드렸다. 그리고 1월 24일 오전 10시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칠고 느려진 할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선종기도를 해드렸다. '할머니, 일요일까지만 기다려줘...'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해드린 마지막 선종기도를 듣고 2시간 후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퇴근하는 남편과 함께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눈물은 최대한 참았다. 할머니가 세례를 받고 돌아가신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는 할머니의 세례소식을 아직 성당에 다니지 않는 가족들에게 알렸고 가톨릭 장례미사를 드려도 좋다는 동의를 받으셨다. 성당에서 많은 분들이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나의 할머니 최도미니카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를 해주러 오셨다. 복이 많으셨던 할머니의 장례식장에는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방문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설명절을 앞둔 기간이라 장례식장에 손님이 없을 것 같다는 예상은 빗나갔다. 장례미사에서 신부님께서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먼저 탄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에 탄 사람은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내린다는 얘기를 들려주시며 할머니가 천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가장 먼저 천국에 도착하셨을 것이라고 얘기하며 가족들을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한 줌의 재로 20년 전 먼저 하늘로 떠난 할아버지를 만나러 하늘로 떠나셨다. 할머니를 보내던 마지막날은 마치 한겨울의 봄날씨처럼 햇살이 따뜻했다.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삼오미사를 드리기 위해 친정아빠는 엄마와 성당에 같이 가셨다. 아직 세례를 받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엄마와 함께 할머니의 하늘여행을 기원하며 기도를 정성스럽게 들였다. 그리고 신부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셨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다음날은 올 겨울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마치 할머니가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눈오기 전에 떠나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슬픔보다는 감사가 앞섰다. 정말 일요일에 자식과 손주들까지 다 보고 돌아가신 할머니. 행여나 할머니 보내드리는 길에 눈이 와서 힘들까 봐 마치 날짜를 맞추신 것 같았다.
할머니를 보내드린 지 한 달 도 안되어 할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졌다. 세례도 받고 보고 싶었던 가족들 모두 만나고 집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신 복 많은 분이라는 말로 할머니를 보내드린 슬픔을 감사로 승화하고 있었기에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하늘에서 할아버지 만나서 증손주 8명까지 보고 왔다고 자랑하라고 했는데 지금쯤 자랑하면서 행복한 시간 보내고 계시겠지....
문득 할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 별로 없다.... 언제나 가족들을 위한 걱정이 먼저였다.... "바빠서 어떻게 왔어, 밥은 먹었어?", "또와~", "고마워." 이 세 가지 말은 할머니가 가장 많이 해주셨던 말이다. 자식들과 손주들 걱정이 항상 먼저 앞섰던 할머니! 할머니의 걱정에 "나 잘하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돼!"라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바쁘게 생활하다 힘들어서 친정에 가면 친정엄마의 위로와 더불어 할머니의 따뜻한 걱정과 위로에 힘을 얻었다. 그런데 이제는 할머니의 다정한 위로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할머니를 보내고 돌아온 일상에서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매 순간 바빠서 고생하는 큰손녀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새벽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걸어가는 동안에도 마치 내 옆에 할머니와 와서 같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다정했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움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2025년 4월 8일 화요일에 또 한 번의 이별을 맞이했다. 친정엄마는 오빠를 잃고 나는 외삼촌을 잃었다.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으로 외삼촌이 운영했던 이용원에 가면 칭찬도 많이 해주셨고, 가끔은 내 단발머리를 예쁘게 잘라주셨던 외삼촌이 하늘로 여행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서 외삼촌의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을 보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소중한 시간에 함께했던 외삼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여기던 오빠를 잃은 슬픔이 큰 친정엄마를 더 위로해드려야 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지쳐버린 친정엄마 앞에서 나까지 슬픔을 드러내고 울 수는 없었다. 엄마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엄마의 얘기를 들어드렸다. 엄마가 슬픔을 달랠 수 있도록......
두어 달 사이에 소중하고 사랑했던 할머니와 외삼촌을 떠나보내고 나는 밀려드는 공허함을 채우기 어려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내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잠을 자다가도 깨면 생각나고, 하루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밀려드는 그리움은 덮을 수 없었다. 울음밖에는 달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이면 걱정하게 될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퇴근 후 차 안에서 한참을 울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너무 보고 싶은데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별의 슬픔을 달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슬픔을 달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