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언 땅을 녹이고 그 안에 있던 생명들을 세상에 내놓는 환희의 계절이다.
봄이 되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봄 냄새를 맡으며 들판이며 강이며 산을 돌아다니고 싶다.
봄 냄새가 가득한 바람과 꽃을 보면 탄성이 나온다.
이 봄,
들판과 대기 속에 살아있다는 것은 터지는 꽃망울처럼 기분 좋은 일이다.
어서 밖으로 나가자!
꽃이 환하게 핀 마을 속을 걸으려고 찾아간 4월 초 안동 하회마을.
입구에 있는 먹거리 장터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래전에는 하회마을 안에 식당들이 있었는데 달라진 모습이었다.
유네스코 유산인 하회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상점들이 입구로 나왔다고 한다.
하회마을까지는 걸어가도 되고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가도 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부용대 쪽 길에 벚꽃이 환하게 피어있다.
가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다.
논에 벼가 노랗게 익어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가을 들판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 후 하회마을 하면 그 노란 들판이 떠올랐다.
산란기인지 개구리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시골에서 밤에만 듣던 개구리 소리를 낮에 들으니 좀 신기했다.
한옥 마당에서 느긋하게 봄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평일이라 그나마 있는 작은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마을이 진짜지"라고 했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부용대에 가려고 했지만 돛단배도 운행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부용대에 가려면 마을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는 터덜터덜 마을을 돌아보고 나왔다.
걷다 보니 벚꽃 핀 길에 노점이 하나 있었다.
환호하며 달려가 커피를 샀다. 그러고 나서 앞을 보니 이런 풍경이 있었다.
풍경을 해석해야 하나...
마악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가지 너머로 밭과 초가집과 기와집과 산, 그리고 길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문 닫은 카페 마당으로 들어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마당에 가득 퍼진 햇살을 바라보며 살랑이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으으으.....
부용대 쪽 강가 풍경.
비가 오지 않아 강에는 물이 적었지만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물가의 나무들이 하늘의 색과 벚꽃나무 가지와 어우러져 풍경화가 되었다.
마을을 나와 병산서원으로 걸어가기 위해 들판길로 들어섰다.
이정표가 없어서 길을 많이 헤맸다.
소풍 온 차림으로 왔다가 어쩌다 산악인이 되어 V자로 꺾인 산을 헉헉대며 오르고 내리고...
산에서 길을 잃는 것이 몹시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도 저기도 올라가도 내려가도 길이 없었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데 수명을 다해 떨어진 나뭇가지가 큰 힘이 되었다.
지팡이의 용도를 깊이 새긴 시간이었다.
겨우 찾은 길
먼저 올라가서 환호를 지르며 옆을 본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좀 쉬운 길로 가려고 포기했던 바로 그 오르막길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있어 길이 생겼을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실은 많은 사람들의 한걸음 한걸음의 결과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길을 내준 모든 발자국들에 감사한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을 가려면 낮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산 정상에 이르자 정자가 하나 있고 산 아래로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호젓한 산길을 내려간다.
흔들리는 몸의 리듬이 우리의 고생을 잊게 하고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세상은 조용하다.
산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홀로 세상을 밝힐 듯 피어있는 산벚꽃의 향기가 문득 지나간다.
예전에 습지였던 곳이 길이 된 듯하다.
바닥은 모래와 수풀로 덮여있고 나무들의 형태가 그냥 땅 위에서 자라는 나무와 모양이 사뭇 다르다.
아름다운 길이다...
초록의 습지 위로 지는 해의 햇살이 퍼져 들어와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세찬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기도 하고 원시림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있는 곳이다.
병산서원 도착 전 만난 벚꽃나무
병산서원 입구가 보인다.
마루에 걸터 앉아 해그림자를 드리운 마당을 본다.
역사책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대청마루 뒷문 틀에 풍경이 자리 잡았다.
이 풍경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조금씩 변하고 자라고 소멸하고 다시 생겨날 것이다.
마루에 누우니 하늘과 한옥의 지붕이 한컷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시간이다.
아무 걱정 없이 서까래의 나무를, 밤이라면 별이라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안동에 오면 꼭 먹어보라는 헛제삿밥.
이렇게 한상 받으니 이 상을 차리기 위해 또 맛을 내기 위해 애쓴 이들이 고맙다.
음식에서 느껴지는 정성과 담백한 맛,
게다가 눈도 즐거운 밥상에 저절로 손이 바빠진다.
엄마는 식당에 가서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맛있게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이 식사를 준비한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저녁노을로 가득 찬 차창 속에 오늘 하루가 스치고 지나간다.
누군가 말했다.
어제는 없고 내일은 모른다.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