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봄 사이
섬진강을 몹시도 사랑하게 된 지 어언 2년,
봄이 시작될 즈음에 자주 구례에서 하동까지 걸었고,
한 번은 김용택 시인의 생가인 진메마을에서 장구목 가든까지 걸었다.
이번에는 좀 더 상류 쪽을 걸어볼까 찾아보다가
섬진강 곡성 구간을 발견했다.
곡성역에서 구례구역까지 걷는 길이 있었다.
겨울이 아직은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밤기차를 타고 곡성으로 내려갔다.
역에 내리니 밤비가 세차게 내린다.
곡성 기차마을 뒤쪽에 있는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
편의점에 들려 저녁거리를 샀다.
우리가 걸었거나 걷고자 했던 길
곡성역 - 4.3㎞ - 침곡역(폐역) - 5.1㎞ - 가정역(폐역) - 12.5㎞ - 구례구역
아침에 일어나니 숙소 뒤쪽이 너른 논이었다.
처마 끝에 드리운 하늘과 산이 잘 어울린다. 숨통이 트이는 듯 시원하다.
숙소 주인장에게 물어 섬진강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쌀쌀함 속에서도 초록의 생명들은 살아 오르고 있었다.
곡성역 농협주유소를 왼쪽으로 끼고 조금 걸어가니 철길이 나온다.
기차마을 관광열차가 하루 몇 번 오가는 철길,
진짜 기차가 다니는 철길은 왼쪽에 따로 있다.
발에 와사삭 밟히는 돌들의 느낌... 철로 위를 걸을 때의 아슬함.
철길을 걷다 보니
말썽쟁이 여고생 시절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수인선 철로길을 걸어서 집에 가다가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선생님에게 들켜 단체로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났다.
철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상상력의 공간...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위로가 그곳에 있다.
나뭇잎 하나 없는 나무들의 단순함이 좋다.
철길을 건너고 언덕을 내려와 옛날 굴다리를 지나니 섬진강이 나온다.
섬진강 침실습지, 놀랍도록 아름답다.
뚝방길을 걷다 갑자기 나타난 이곳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이 곳은 곡성천, 금천천, 고달천이 만나면서 거대한 습지를 이룬 곳이다.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600종이 넘는 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있는 국가습지라고 한다.
겨울과 봄 사이 애매한 경계에 있는 이 계절은
어느 호젓한 산아래 밭에서
호미질하는 농부의 뒷모습처럼 쓸쓸하고 풍요롭다.
강의 흐름과 반대로 걸은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힘이 들었었다.
이날은 강의 흐름대로 걸었다
나와 풍경이 함께 가고 있다는 편안함
다리를 건너다가
물의 흐름과 마주 서보니 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물의 기세가 갑자기 두려워 졌다.
물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구체적으로는 2014년 4월 16일 이후이다...
그 먹먹한 슬픔의 물이 아직도 내 몸에 흐르고 있다.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산수유의 노란 아릿함...
다리를 건너오니 씽씽 달리는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호젓하게 강물을 오른쪽으로 두고 숲과 마을길을 걸을 수 있었다.
문득 발견한 맞은편 산속 교회,
당연한 듯 서있는
과장되지도 않고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않은 모습에 눈길이 갔다.
물결을 만들며 잔잔하게 흐르는 강 옆으로
농사 준비를 하고 있는 농부들과 겨울을 너끈히 이겨낸 초록의 배추가 있다.
걷다 보니 한옥으로 지은 제법 넓은 카페가 나온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카페 뒤란으로 갔더니 나무를 때서 방을 뎁히는 아궁이가 있다.
바람을 맞아 추웠던 우리는 웅닥옹닥 모여 불을 쬐는데
현대식 난로나 난방이 주는 따뜻함과는 다른 따뜻함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댁 아궁이 앞에서
불의 열기를 얼굴에 가득 받으며 앉아 있던 따뜻한 기억...
카페에 자리가 나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쉬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서 보이는 강물과 먼 산.
편안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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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시간이 다가와
곡성 청소년 야영장을 지나 얼마쯤 걷다가
택시를 타고 구례구역으로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의 모든 화두를 집어 삼키기 전 다녀온 섬진강...
봄이 오면 다시 걷자는 약속이
어느 계절에 실행될지 모르겠지만,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는
이겨낼 것이고 그 이겨낸 경험을 통해 좀 더 나아지고 따뜻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힘내자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