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그리고 선택
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력에 조용히 표시해둔 그 날짜를 보며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는 우리끼리만 조용히 지내기로.
그 결심에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50일 때의 일이었다. 주말에 남편이 집에 왔을 때, 우연히 그의 휴대폰 화면을 보게 되었다. 시누이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사돈댁에서 연락 왔는데, 50일인데 옷 한 벌밖에 안 해줬다고 서운해하시더라."
황당했다. 나는 그 통화 자리에 있었으니까. 아빠도 옆에 계셨다. 엄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50일을 함께 못해서 아쉽다고, 내가 회복하면 백일은 꼭 함께하자고 말씀하셨다. 몸조리가 우선이라며 무리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엄마, 정말 그런 말씀 안 하셨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엄마는 억울해하셨다.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래? 참..." 목소리에 상처가 묻어났다.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시누이의 의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일로 우리 가족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백일은 어떻게 할까?"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조용히 하려고요."
내 대답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백일 준비는 소박했다. 시장에서 엄마와 함께 장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백일이라는 게 참 의미 있는 날이야. 옛날에는 아기들이 백일 넘기기가 쉽지 않았거든. 그래서 무사히 넘기면 큰 잔치를 했던 거지."
맞다. 우리 아이는 건강하게 백일을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화려한 상차림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했다. 백설기 대신 막냇동생이 예쁜 주문 케이크를 준비해줬다. 작은 상이었지만 정성이 들어갔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얼굴은 무한한 것을 현전시킨다"고 했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말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이 작은 존재 앞에서 나는 온전히 엄마였다. 다른 누구의 며느리도 딸도 아닌, 그저 이 아이의 엄마.
백일 전날 밤,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신생아 때의 연약한 모습에서 이제는 제법 통통해진 얼굴. 옹알이도 하고 뒤집기도 하는 아이. 이 모든 성장이 소중했다.
백일 당일 아침부터 분주했다. 내가 미리 준비해둔 작은 정장을 꺼냈다. 흰 셔츠에 작은 조끼, 나비넥타이까지. 아기용 정장이라니,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이에게 정장을 입히는 순간이 뭉클했다. 작은 신사 같은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우리 아기 정말 멋지네." 엄마가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상차림은 간소했지만 따뜻했다. 엄마가 끓여주신 미역국, 좋아하는 나물들, 그리고 막냇동생이 준비한 작은 케이크. 마침 주말이라 남편도 함께할 수 있었다.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사진 찍어야지." 엄마가 휴대폰을 꺼내셨다. 남편과 나, 그리고 친정 부모님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아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찍은 사진들. 큰 잔치는 아니었지만 진짜 가족들만의 특별한 순간이었다.
남편도 함께 백일을 축하해주었다. 조용한 우리만의 잔치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시댁 쪽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런 복잡한 관계들을 잊고 싶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 어린 시절 백일잔치 이야기, 아이의 성장 과정, 앞으로의 계획들. 복잡한 관계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오늘만큼은 그런 것들을 잊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 아이를 재우면서 하루를 돌아봤다. 큰 잔치는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의 건강을 축하하고, 가족들과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백일상을 치우면서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시댁 식구들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 전의 일도 그렇고, 50일 때의 일도 그렇고,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될 것 같았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을 것 같아."
차단 버튼을 누르는 순간 홀가분했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의 무한성. 그것은 부담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아이를 보며 느끼는 이 마음, 지키고 싶은 이 마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용한 백일잔치였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만의 축하가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이 없어도, 큰 상이 아니어도, 진심이 있으면 충분했다.
밤에 아이를 재우며 백일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정장을 입고 웃고 있는 아이. 이 한 장의 사진이 어떤 화려한 잔치보다 소중했다. 우리만의 백일, 우리만의 축하.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내일이면 오늘의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조용히 지킨 우리만의 시간.
창밖으로 달이 보였다. 저 달도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소박한 것이 더 진실하고, 조용한 것이 더 깊이 있다. 우리의 백일이 바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