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으스대며 1백 가지도 넘는 꽃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하는 내 말버릇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다. 듣는 사람은 아마 백화난만한 꽃밭을 생각하겠지만 그것들은 한꺼번에 피지 않고 순서껏 차례차례 핀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는 목련부터 논에 띄지도 않는 돌나물 꽃까지를 합쳐서 그렇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가짓수를 다 셀 수 있냐 하면 그것들은 차례차례로 오고,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산문집 <호미>에서--
소설가 박완서는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꽃출석부를 들고 꽃들을 기다렸다. 1번 복수초부터 출석을 부르면 차례차례 꽃을 피웠다.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그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아치울 노란집'에서 호미나 모종삽을 들고 마당 이곳저곳을 누비곤 했다. 꽃출석부는 그가 마당에서 얻은 삶의 지혜이자 생활의 기쁨이었다.
꽃출석부는 사실 우리 주위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나의 생활공간에서는 이른 봄부터 산수유, 백목련, 자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가 순서대로 개화를 한다. 노란 막대사탕 같은 산수유 꽃이 필 무렵이면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의 한 해는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추운 날씨가 3월에도 지속되어서인지 산수유가 조금 늦게 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올해 나의 꽃출석부는 뒤죽박죽이었다.
올해 수도권의 벚나무 개화시기는 4월 초이었다. 이 시기에 집 앞에 산책을 나섰는데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가 동시에 꽃이 피어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두륜산에 다녀왔다. 여기는 벚꽃이 흩날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이곳 땅끝 마을도 벚꽃이 한창이었다.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 현진오 소장에 따르면 서울과 전라남도 구례의 벚나무 개화시기는 불과 하루 이틀 차이이다. 그리고 서울의 벚나무 개화시기가 대전의 그것보다 앞선 때는 이미 10년도 넘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주에도 이어졌다. 은은한 향기가 우리 동네에도 학교 교정에도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보라 꽃잎의 수수꽃다리가 화사하게 꽃잔치를 하고 있었다. 수수꽃다리는 5월의 꽃이 아닌가? 아직 4월 초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비사회적기업인 네이처링은 올해 개나리와 벚나무를 이용하여 봄꽃지도 만들기 미션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탐사하고 보내온 기록을 바탕으로 본 올해의 개화시기는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흔들어 놓고 있다. 올해 제주보다 경남의 벚나무가 먼저 개화하였다. 전에는 우리나라 남부와 중부의 개화시기가 보름 정도 차이가 났지만, 이제 불과 며칠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시민들이 보내온 자료이기 때문에 들쑥날쑥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큰 흐름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개화시기뿐만 아니다. 농촌진흥청에서 진행하는 양서류 생물계절 연구결과에 따르면 초봄에 번식을 하는 경칩개구리의 출현시기가 작년보다도 훨씬 앞당겨졌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에 출현하는 도롱뇽과 두꺼비의 출현시기는 작년과 비슷하거나 늦어지기도 하였다. 올해 유난히도 긴 겨울은 식물의 개화시기를 전반적으로 짧은 기간으로 압축시켰는데, 양서류의 출현시기는 오히려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의 기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우리나라에서 뚜렷한 기후변화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활동과 구조물로 인해 도시의 중심이 변두리나 외곽보다 온도가 높은 열섬효과이다. 기후변화와 열섬효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주로 초봄에 생명활동을 시작하는 생명체이다. 너무 일찍 출현하면 추위에 위협을 받을 수 있고, 너무 늦게 출현하면 다른 생명체와 경쟁해야 한다. 이 두 힘의 조합은 생명체의 계절활동을 매년 앞당기고 있으며, 그 효과는 대도시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열섬효과도 자연생태계에 심각한 교란을 초래하고 있다. 서울시 내에서도 열섬효과가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이 있다. 열섬효과가 높은 지역의 말매미의 밀도는 열섬효과가 낮은 지역보다 7배가 높았다. 열섬효과가 높은 지역의 참매미의 밀도는 열섬효과가 낮은 지역보다 무려 22배나 높다. 왜 열섬효과가 매미의 밀도를 높이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활동이 생명체의 출현이나 밀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와 열섬효과의 치명적인 조합은 단지 자연생태계만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21세기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기후변화를 지목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여름에 폭염은 주기도 잦아지고, 정도도 심해지고 있다. 폭염은 특히 노약자나 어린이를 중심으로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또 기후변화는 전염병을 확산시키고, 기존의 질병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해충이나 병균을 유입시키기도 한다.
뒤죽박죽 꽃출석부는 하나의 전조에 불과하다. 4월 말인데 한여름 같은 날씨,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조류독감과 구제역, 늘어만 가는 폭염일수와 열대야 등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어느 해보다 백화난만한 봄이었지만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미래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삶의 지혜와 생활의 기쁨이 전혀 통하지 않는 다른 시간이 될 것 같다.
이 글은 2017년 5월 2일자 경향신문 <장이권의 자연생태 탐사기>에 발표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012116005&code=9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