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째 낭독하며]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정호승 시인이 집필한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 450쪽의 챕터 제목이다. 2022. 8. 20일 토요일 아침 15번째 낭독을 했다. 이 챕터는 아무리 많이 낭독해도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내 가슴 한구석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있다. 14번째 낭독할 때와 그 기분이 또 다르다. 블로그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있다고나 할까?
15번째 이 챕터를 낭독하며 이어령 선생과 스티븐 코비 박사가 생각났다. 김지수 작가가 집필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선생은 나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지, 용서해 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
이어령 선생의 얘기했던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순간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곰곰 생각해 봤더니, 우리는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죄악을 저지른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됐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다. 타인보다는 나를 우선시하는 과정에서 거짓말, 타인을 힘들게 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얘기다. 이어령 선생의 이 말을 내 가슴에 깊은 깨달음을 일깨워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어령 선생이 했던 말은 이 챕터를 낭독하면서 용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가치 중에 용서와 사랑이라는 가치가 있다. 평생을 용서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사례가 이 챕터에 나온다. 바로 달라이 라마의 <용서>라는 책에서 달라이 라마와 잘 알고 지내는 스님 얘기를 적었다. 이 스님은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했을 때 피신하지 않아 체포되어 18년 동안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달라이 라마는 20년 만에 인도에서 이 스님을 만났고, 그 스님에게 ‘18년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두려웠던 적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 스님은 ‘나 자신이 중국인들을 미워할까 봐, 중국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게 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낭독하면서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첫 번째 습관인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에 나오는 얘기가 생각났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빅터 플랭클린 얘기를 적은 것이다. 그는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살아났던 이유는 자극과 반응 사이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작은 감방에 홀로 발가벗겨진 채로 있을 때, 인간이 가진 가장 마지막의 자유, 나치들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즉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 사이에서 반응을 선택할 자유, 그 권한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오묘한 진리다. 알고 있는 것과 깨닫는 것과의 차이라고 할까? 이 사실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내 가슴이 떨렸다.
시인께서 이 챕터에서 얘기했던 일부분을 정리해 봤다.
사랑과 고통이 한 몸이듯이, 사랑과 용서도 한 몸이다. 용서는 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다. 용서를 잊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통념이다. 용서는 내게 상처 준 이에게 넘겨준 내 삶의 통제권에서 나를 해방 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상황이 나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라고 시인께서 얘기하고 있다.
결국 이 챕터를 읽으며 깨닫게 된 것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 코비 박사의 7가지 습관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습관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영향력의 원안에 있는 것을 행사해야 한다. 분노하는 것은 영향력 밖의 행위를 하는 것,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 2막은 살아온 날 보다, 살날이 점점 줄어든다. 우리 삶의 가치를 용서와 사랑에 둔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자극과 반응 사이, 선택의 자유를 더 마음껏 누리고 싶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심오한 뜻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찌꺼기를 걷어내는 낭독의 효과를 만끽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