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살이 45년

by 질경이


미국에서 산지 45년, 내 나이 서른에 왔으니 이제는 내가 태어난 한국에서 산 것보다 이곳 미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더 길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도 한국말로 생각하고 한국말로 꿈꾼다.

미국에 살며 내 두 아이들에게 나의 모국어를 반드시 가르쳐서 아이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며 살겠다는 야무진 생각은 아주 오래전 여지없이 무너졌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노동보다 더 어려웠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이 아이들은 빨리도 자라 내 곁을 떠나갔다.


그 시절, 아름다웠어야 할 한창때에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 돌아볼 여유조차 내게는 없었다. 아이들 다 자라 나가고 내가 꼭 해야 할 일들을 대충 마쳤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평생 일만 해 온 많은 사람들이 대충 그렇듯이 여행을 생각했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내가 살고 있고 30년 넘게 살아온 이 나라,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이 나라,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고 그 아이의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미국을 보자. 미국을 알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보아야 하나…

미국의 국립공원들부터 시작했다. 미국이 건국 이래 아주 잘한 일 하나 꼽으라면 국립공원을 만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국립공원은 내 마음을 빼앗았다. 경치는 기본이고 지질학적인 면이나 자연보호, 누구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언제 가도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20년 전 여행을 시작할 때 내가 교과서처럼 가지고 다니던 "National Parks" 책에는 미국의 국립공원이 50개였다. 그걸 다 보는 것이 나의 첫 목표였다. 그 당시 50개이던 국립공원이 지금은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 하와이, 미국령 사모아와 버진 아일랜드에 모두 합해 63개가 되었다. 그중에는 보호 차원에서 지정한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일반인은 가기 힘든 곳이 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국립공원 네 곳은 자동차로는 갈 수가 없고 비행기를 대절해야만 갈 수 있었다. 63개 국립공원을 15년 만에 다 가 볼 수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대륙횡단을 30번쯤 했다. 그리고 열심히 사진기에 담아 왔다.

미국은 아름답고 미국은 넓었다. 자이언 국립공원은 30번을 넘게 갔어도 여전히 좋다.

이제는 여행을 떠나기 전 미국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역사적 도시와 국립공원들을 다시 찾는다. 다녀와서는 돌아다니며 보고 온 곳들을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본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 역사는 짧지만 볼 것과 배울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글래이시어 내셔날 파크

처음에는 서부 개척사, 거대한 교회들과 아름답고 거대한 저택들 같은 승자의 역사만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데이비드 소로우, 나타니엘 호손, 존 스타인벡, 헤밍웨이 같은 미국 문학가의 책을 읽고 그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려고 찾아다닌다.

그리고 미국 역사를 읽으며 이 땅의 주인이던 인디언들이 눈물을 흘리며 쫓겨 가던 길,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들이 노예로 팔리던 시장, 링컨이 태어나 자란 곳들을 가서 보고 이 나라에서 일어 난 일들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한국말만 쓰라고 윽박지르고 한국식 사고방식을 강요할 때 멀어져 갔던 아이들이 이제는 다가와 말을 건다.

에덴의 동쪽과 노인과 바다를 읽고 헤밍웨이 집과 살리나스에 있는 스타인벡의 생가를 갔다고 하니 딸아이가 반색을 하며 말문이 터트린다.

"엄마는 왜 미국에 살면서 미국과 미국 사람을 멀리하세요" 했던 아이들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체력이 허락하는 한 더 많은 곳을 보러 다니며 내가 본 것들을 사진기에 담아 올 것이다.

내가 어느 곳에 살던지 더 나이 들어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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