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엔 빙그레 웃는 아이 얼굴 그림이 놓여 있다. 기분이 나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나는 이 빙그레 웃는 아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람이면 누구나 할 짓과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다. 인간은 더러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구분을 망각할 때가 있다. 저작권 문제도 그런 경우다. 욕심이 이성을 넘어 춤출 때, 빙그레 웃는 아이 얼굴 같은 정화제를 곁에 둔다면 폭주하는 탐욕을 상당 부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래 선생이 쓴 <천년의 질문> 1권에는 본문의 맥락과 무관하게 일종의 ‘저작론’이 언급돼 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1차적으로 여러 가지 책들과 공부를 통해서 습득됩니다. 그런 다음 2차적으로 그 지식들을 소화시키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3차적으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인식과 논리를 구축해야만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자기 가치관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위 책 145쪽)
조 선생의 생각처럼 너나없이 3차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만을 내놓는다면, 이 지구상에 저작권 때문에 벌어지는 다툼이나 사고, 송사는 희귀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디 한 부모 아래 태어나도 같은 꼴이 하나 없는 저마다 고유한 존재다. 인간은 저마다의 꼴을 갖고 저마다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생물체다. 구태여 체로키 부족의 옛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착한 늑대와 못된 늑대가 함께 산다는 것쯤은 초등학교 4학년만 돼도 느낄 수 있다. 우리들 마음 중 어느 마음이 솟구치느냐는 각자가 어느 늑대를 잘 기르냐에 달려 있다.
저작권은 통상 ‘보호’라는 단어와 짝을 이룬다. 보호의 장막이 허물어지면 그 대척점엔 논란, 사고, 다툼 같은 날카로운 단어들이 저작권과 합을 이룬다. 보호와 논란, 보호와 사고, 보호와 다툼 사이에는 창작자의 명예와 함께 금전적 이익이 대개 도사리고 있다. 생성 AI를 비롯해 급변하는 창작기술이 저작권 훼손에 가세함으로써 이익은 곧잘 명예보다 우위를 점한다. 대량 훼손이 가능해졌기로 다툼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드세진다.
최근 불거진 ‘지브리가 쏘아 올린 작은공’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챗GPT의 ‘챗GPT-4o 이미지 생성’ 기능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튜디오 지브리’ 화풍 스타일대로 이미지를 변환해준다. 이 기능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저작권 침해 논란이 뜨겁다. 처음에는 소셜네트워크 이용자들의 인터넷 밈(*)으로 확산됐다가 최근에 ‘맥도날드 멕시코’가 해당 기능을 이용해 마케팅을 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인터넷 밈(Internet meme)=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지에서 퍼져나가는 여러 문화의 유행과 파생·모방의 경향, 또는 그러한 창작물이나 작품의 요소를 총칭하는 용어, <나무위키> 인용
한 기사에 따르면 “게시물 속 이미지는 ‘지브리 스타일’의 캐릭터들이 해피밀과 빅맥, 감자튀김 등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를 웃으면서 맛있게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해당 게시물은 페이스북에서 3만5000개의 좋아요와 5400여개의 댓글을 받았으며, 약 2300회 공유되며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브랜드브리프 <“저작권 침해 아냐?”… 논란 부른 맥도날드의 챗GPT ‘지브리 스타일’ 콘텐츠> 기사 참조)
저작권 침해 문제는 생성 AI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무방하다. 생성 AI 이전의 저작권 문제는 창작자와 이용자 간 1:1 문제로 간주됐다. 하지만 생성 AI 이후의 그것은 창작자와 불특정 다수 혹은 큰 무리인 대중의 대립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변질된 모양새다. 나쁜 이용자가 1명이라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할 것이다. 하지만 나쁜 이용자가 큰 무리라면 분명한 가해자 1명과 흐릿한 피해자 다수가 돼 책임소재를 따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확산의 규모와 속도에 있어서의 차이일 뿐 저작권 침해와 훼손의 본질은 생성 AI 이전과 이후나 같다는 사실이다. 나쁜 이용자가 일인이건 만인이건 모두 사람이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들 마음속 나쁜 늑대를 춤추게 한 결과가 저작권 사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명징하다. 우리들 마음속 착한 늑대를 춤추게 하면 된다. 사람이 하는 일 사람이 바르게 하면 되는 것이 저작권 침해, 훼손 문제의 첩경이다. 나는 사람들이 저작권 문제를 빙그레 웃는 어린아이들 대하듯 했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얼마나 맑은가. 얼마나 상쾌한가. 어린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들 마음이 넓어진다. 보드라워진다. 따뜻해진다. 왜 그런가. 어린아이들은 이용의 대상이, 경쟁의 대상이, 시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안병욱(1920~2013) 선생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일찍이 ‘오기인(五氣人)’을 들었다. 몸에 원기(元氣)가 충만한 사람이 될 것, 눈에 정기(精氣)가 빛나는 사람이 될 것, 얼굴에 화기(和氣)가 감도는 사람이 될 것, 머리에 총기(聰氣)가 넘치는 사람이 될 것. 선생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이 덕기(德氣)가 풍기가 사람이 될 것이었다. 선생은 덕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근본’이라고 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어질고 따뜻하고 침착하고 조용하고 훈훈하다고 했다. 덕이 풍족하면 저절로 우리의 몸에서 여유와 향기가 풍긴다고 했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여유가 없다. 나쁜 현대인들은 더 바쁘다. 더 여유가 없다. 만날 남의 걸 도용하고 악용하고 훔치려니 늘 조급하고 좌불안석이다. 정화제가 필요하다. 전환이 필요하다. 그럴 땐 저마다 다른 꼴을 하고 있으면서도 순수하고 맑기만 한 어린아이들을 보자. 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보자. 덕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를 것이다. 정말이지 덕기가 온몸을 에워쌀 것이다.
원인을 알고 해법을 알았다면 이제 뭐가 남았는가. 실천이다. 아차, 중요한 한 가지를 빠뜨릴 뻔했다. 나쁜 이용자의 각성만큼이나 창작자의 각성도 필요하다. 바로 천편일률적인 자기 저작권 주장 말고, 적재적소의 자기 저작권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비록 이용자가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공의 목적이라면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또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했다 하더라도 저간의 사정을 살펴 덕기를 풍겨야 한다. 하나의 창작물이 조정래 선생이 말한 “3차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고 해도 1, 2차 과정 없는 3차 과정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창작물을 둘러싼 저작권 문제는 골치 아픈 사고가 아닌 아름다운 사연으로 깜짝 변신할 것이다. 빙그레 웃는 아이 얼굴 같은 미담으로 말이다.
이참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하려다 못한 것인데, 이른바 ‘빙그레 운동’이다. 선생은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강조했다. 우리들 얼굴에서 봄바람처럼 훈훈한 기운이 넘치면 저작권 사고는 그 바람결에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