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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Mar 07. 2020

팬데믹, 광기와 공포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발발 후부터 당장 몇 년, 혹은 100년을 변화시킬 코로나19


아놀드 뵈클린, ‘페스트’(1898). [바젤 미술관]

‘당시 인류가 전염병으로 전멸할 수도 있었다.’ (프로코피우스, 6세기 동로마 역사학자)


‘감염병이 도착하자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기 시작했다. 관도, 무덤도 부족해 10명 또는 더 많은 시체를 한곳에 묻어야 했다. 일요일엔 성 바오로 성당 앞에서만 300구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성 그레고리우스, 6세기 프랑스 투르(Tours) 주교)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염병’이라 불리는 6세기 팬데믹. 인류 첫 팬데믹은 아니었겠지만, 잘 기록된 첫 전염병 중 하나였다. 쥐와 벼룩을 숙주로 삼는 박테리아는 벼룩을 통해 사람에게 전달되고, 감염자는 며칠 만에 사망했다. 중앙아시아 또는 중국에서 시작해 실크로드를 건너 중동과 이집트로 번졌고, 곡식을 이집트에서 수입하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엔 541년 도착했다. 항생제도, 소독약도 없던 시대의 팬데믹. 결과는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 매일 5000명 이상이 죽어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 4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시체를 묻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보다 묻혀야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자, 죽은 사람들은 길거리에 방치되기 시작한다. ‘세상의 주인’이었던 로마제국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동로마인은 이제 개와 새들의 먹잇감이 됐다.   

  


피터 브뤼겔, ‘장님을 이끄는 장님’(1568).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


동로마 정교회는 화장을 금지하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명령한다. 오늘날 갈라타라 불리는 금각만(Goldn Horn) 건너편 지역을 둘러싼 성곽을 허물어 시체로 채우라는 것이었다. 썩고 부패한 역겨운 냄새로 가득한, 아놀드 뵈클린의 그림처럼 지상의 지옥으로 변한 도시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질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인간은 언제나 원인과 이유를 묻는다.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뇌가 처음부터 원인과 인과관계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창을 던지면 먹잇감에 맞고, 큰 소리와 불로 위협하면 맹수들이 도망간다. 썩은 냄새 나는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고, 벌레에 물리면 가려워 잠을 잘 수 없다. 과거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게 해주는 ‘원인’이라는 막강한 도구.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원인은 처음부터 직접 보고,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현상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는 원인이라는 확신이 주는 심적 안심과 존재적 위로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걸까? 도시와 문명과 인터넷을 만든 우리는 여전히 원인과 인과관계에 집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콘스탄티노스폴리스에서 벌어진 대재앙. 누군가의 잘못 때문 아닐까? 프로코피우스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악마 같은 본성 때문이라 믿었고, 교회는 죄 많은 인류에게 내린 신의 벌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대인들이 가장 수상했다. 구원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 아니었던가? 교부이자 수사학의 대가였던 성 크리소스토모 역시 설교하지 않았던가?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그렇다, 너무나도 복잡해진 세상에서 여전히 단순한 원인을 기대하는 인간에게 재앙은 언제나 누군가의 ‘죄’에 대한 ‘벌’이며, 죄를 씻어내고 뿌리 뽑아야만 세상은 다시 안전하고 행복해질 수 있어 보였다. 중세기 흑사병 역시 유대인들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 아래 대학살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이단 종교들 때문이고, 사산제국의 패배는 ‘불멸의 불’이 꺼져버려서란다. 터키의 불행은 쿠르드족 때문이고, 프랑스의 행복은 독일과 영국이 막는다. 서로서로 의심하고 증오하게 하는 원인에 대한 인류의 집착. 예측불가능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빠지게 되는 인간의 하드웨어적 착시현상 중 하나다. 특히 모두를 두려움과 패닉에 빠지게 하는 팬데믹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니 모두 중국인을 증오했고, 한국으로 퍼지니 갑자기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유대인’이 됐다. 어제까지 한국인을 차별하던 이탈리아인은 이제 영국에서 왕따가 되었고, 영국에 바이러스가 도착하는 순간 그들은 또 다른 이들의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중세기 흑사병을 표현한 미카엘 볼케무트의 ‘죽음의 무도’는 동시에 자신의 불행과 두려움을 언제나 타인에게 아웃소싱하려는 우리 인간들의 ‘비겁의 무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불행과 행복은 사실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다. 우리에게 방탄소년단 공연장 최고의 좌석을 얻는 행운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필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인생 대부분은 우연과 확률의 꼬리물기다. 필연과 운명은 현실이 아닌 예술과 종교의 영역일 뿐이라는 말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무지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정치와 애국심과 종교만을 통해서는 어려울 것이다. 팩트와 논리가 기본이 아닌 답은 결국 “장님을 이끄는 장님” 같은 역할을 할 뿐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팬데믹의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닌, 바이러스는 생명체의 영원한 동반자였다는 현실적 인정으로 시작해야 한다.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는 최근 “인류에게 질병과 전염병은 본질적 팩트이자 거울이다”라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기본 생명체의 기능을 갖지 않은 바이러스의 진화적 기원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초기 생명체에서 우연히 독립된 유전자 정보라는 가설도 있고, 반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던 유전자 정보들이 한곳에 갇히며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카엘 볼게무트, ‘죽음의 무도’(1493). [뉘른베르크 연대기 삽화]

바이러스는 숙주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를 “해킹”할 수 있기에 생체 면역 조직은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와 끝없는 전쟁을 벌여야 한다. 특히 타 종으로부터 전파되었기에 아직 면역성을 가지지 못한 동물성(zoonotic) 바이러스는 위험하다.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 역시 박쥐로부터 다른 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성 바이러스다. 치사율은 1% 미만이지만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100%인 듯하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버튼 하나만 눌러 지구 반대편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버튼 하나로 음식과 드라마 주문이 가능한 세상에 적응한 우리. 세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언제든지 알 수 있고, 세상 모든 일을 제어할 수 있다는 망각에 빠진 21세기 인류에게 자연은 말하려는 듯하다.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고. 나무 아래로 기어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감염병과 바이러스는 인류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이미 수많은 팬데믹을 극복한 우리는 이번 팬데믹도 극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기도를 통해서는 아니다. 인류가 극복한 수많은 다른 문제와도 같이 결국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를 현실의 불행에서 해방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학과 기술, 논리와 이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724217?cloc=joongang-mhome-Group25



코로나19 확산 이후 주일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외국의 한 교회 내부 모습. 대한민국이 멈춰선 듯하다. 평소에 다니던 길이 막히지 않고 평소 붐비던 커피숍에 가도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지난 20년간 세상은 인터넷 공간으로 옮겨간 듯했지만, 

이번 코로나사태를 통해서 깨달은 바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붐비는 장소를 좋아하고 경제의 많은 부분이 오프라인 공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인류 공간의 진화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더 많이’와 ‘더 빨리’다. 

단위면적당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고밀화 공간으로 진화했고, 더 빠른 교통수단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재 인간은 인구 1000만 명의 도시를 만들었고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을 가는 세상에 산다. 수렵채집 시기에는 한 사람이 먹고살려면 100만㎡의 땅이 필요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기가 끝나자 일부 지역은 물 부족으로 시달렸다. 사람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강가로 모여 살게 되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사냥감이 부족했다. 좁은 면적에서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새로운 식량 조달 방법이 필요했다. 인간은 사냥을 버리고 농업을 선택했다.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면적은 500㎡다. 사냥 대신 농사를 지으면 같은 면적의 땅에서 2000배나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셈이 나온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좁은 공간의 땅에 더 많은 사람이 살면 전염병에 취약해진다. 


의료와 위생 기술이 없던 시절에 그나마 세균성 질병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에 가장 대처하기 쉬운 조건은 건조한 기후였다. 건조기후에서는 습기가 부족해서 세균증식이 어렵고, 비가 오지 않아 바이러스 전파가 적기 때문이다. MIT의 연구에 따르면 비가 오면 빗방울이 땅에 떨어진 후 발포상태가 되면서 바이러스가 옆으로 전파된다고 한다. 비가 적은 건조기후대는 그만큼 바이러스에 강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도시를 통한 문명발전은 건조기후대에서 발생했다. 메소포타미아강과 티그리스강 하구의 건조기후대에서 수메르 문명이 발생했고, 나일강 하구의 건조기후대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생했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사람 간의 교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이는 상업을 발달시켜 부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한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들은 당대에 가장 밀도가 높은 도시를 보유한 국가였다. 로마제국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 미국의 뉴욕이 그렇다. 이 도시들은 경제 규모를 키우기 위해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고밀화된 공간을 만든 도시들이다. 로마는 수도교를 통해 먼 시골에서 물을 끌어와서 식수를 해결하고 위생적 도시를 만들었고, 파리는 하수도를 통해서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18세기 들어 인간은 전염병을 극복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1798년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천연두 백신 개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인류는 백신을 통해서 전염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822년에 태어난 세균학의 아버지, 프랑스 생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저온살균법, 광견병, 닭 콜레라의 백신을 발명했다. 이때부터 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뿐 아니라 백신으로 전염병을 해결하는 시대가 열렸다. 

로마의 수도교가 인구 100만 명의 고대도시를 만들었다면 백신 예방주사는 인구 1000만 명의 현대도시를 만들었다. 의료시스템 덕분에 지난 200년간은 걱정 없이 도시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으로 점차 새로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앨빈 토플러는 통신기술의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는 시골에 살면서 재택근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더 많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더 많은 대도시가 만들어졌다. 시골보다는 도시에 경제적 기회와 짝짓기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는 일어나지 않았다. 직장상사는 부하직원을 감시할 수 있게 눈앞에서 일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이러한 고밀화 지향의 삶의 형태에 유일하게 반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염병이다. 

코로나19는 재택근무와 유연한 출퇴근 시간을 실행하게 만들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던 나이 드신 분들도 배달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각종 경기장, 극장, 학교, 교회 같은 사람들이 모이던 곳에 못 가게 되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은 오프라인 공간에 모여서 하는 행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통의 모임은 종교 모임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공통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었고, 더 큰 집단이 소수 집단의 경쟁자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의 발전 이전 인류는 그림을 통해서 공통의 이야기를 믿었을 것이다. 동굴에 그림을 그리면 그곳은 성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에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식을 강화했다. 공간과 종교는 밀접하다. 그래서 종교는 모이는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경쟁에서 이긴 이유 중 하나다.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어떻게 믿음과 조직력과 종교의 권력을 강화할까?


고대 사회를 상상해보자. 모닥불을 피우고 둥그렇게 앉아서 불을 같이 본다. 같은 불을 함께 보는 공통의 행위는 사람들을 한 공동체로 만든다. 시선이 모이는 공간구조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공연장이나 경기장에서 같은 이벤트를 보는 것은 동질감을 강화한다. 이를 알았던 고대 그리스는 원형극장을 만들었고 로마는 콜로세움을 만들었다. 이때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2000명이 한 강대상을 쳐다보며 설교를 들으면 그것만으로도 설교자에게 권위가 부여된다. 청중들이 개인행동을 못 하기 때문이다. 함께 듣는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졸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기도 힘들다. 주변인들이 그렇게 하면 나도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군집으로 다른 종들을 압도했던 사피엔스는 본능적으로 집단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집단과 다른 행동을 하면 집단에서 쫓겨나고 이는 자신의 생존확률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줄지어 놓인 긴 의자가 앞만 보게 배치된 교회공간은 더욱 그런 경향을 강화한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20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대형교회와 2000명이 동시에 접속해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다르다. 옆에서 설교자를 열심히 쳐다보면서 앉아 있는 사람이 없는 인터넷 예배에서는 같은 내용도 무게감이 다르다. 그래서 종교는 항상 모이기를 힘쓴다. 전염병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모이려는 곳은 종교 공간일 것이다. 모여야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최대 발병지가 신천지 집회장소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정상적 종교단체라면 전염병 기간 중 실내공간에서 모이는 것은 자제했을 것이다. 후발주자 신천지는 해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하면 종교는 집단공간이 만드는 권력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종교단체 최고의 적이다. 역사적으로 중세 때 흑사병으로 1000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졌던 교회가 힘을 잃었고, 이후 르네상스라는 인문개혁이 일어났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통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을 분야는 유통상업과 더불어 종교일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가속할 전망이다. 라이프스타일 변화는 공간의 재구성을 만든다. 공간구성의 변화는 우리 사회 내 권력의 재배치를 만든다. 인터넷으로 대형언론사의 권력이 분산되자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권력분산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공간을 통한 권력의 재배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지 잘 지켜봐야 한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724236?cloc=joongang-mhome-Group34



한편, 감염병 예방을 위해 모든 활동의 기본 전제가 ‘비대면’ ‘비접촉’이 됐다. ‘집콕’ 시간이 길어지면서 심심해진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중국인들은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활용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를 일컫는 ‘클라우드 라이프(云端生活 랜선 라이프)’라는 용어마저 파생시켰다.

  

방청객이 사라진 녹화장에서는 시청자와 랜선으로 연결해 소통하는 ‘클라우드 예능’ 방식이 도입됐다. 일반 대중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랜선 생활 영역이 보다 확장됐다. 쇼핑부터 운동, 노래와 춤, 클럽 디제잉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찍어 올린다. 이 가운데 코로나 특수를 가장 크게 누린 앱은 콰이(快手 콰이서우), 틱톡(抖音 더우인)과 같은 쇼트클립앱이다. 코로나 발생 후 현지 모습을 담아 올린 영상 대부분이 쇼틀클립앱으로 중국인들이 촬영한 것이다.


알리바바의 기업용 메신저 딩딩(钉钉)은 코로나 시국 가장 핫한 앱으로 떠올랐다. 춘제 직후 처음으로 국민 메신저 위챗을 제치고 SNS앱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중국 2만여개 학교들이 온라인 강의 플랫폼으로 딩딩을 사용하기로 한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많은 기업들이 재택근무에 돌입함에 따라 기업용 메신저를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기업용 메신저의 편의성을 경험한 다수 회사에서 코로나 이후에도 해당 플랫폼을 지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관측한다.


사실 신선식품 온라인 배송은 중국에서도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허마(盒马) 등 신선식품 온-오프라인 연계 마트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다만 이전까지는 신선식품 배송이 대도시-젊은 세대의 전유물이었다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 윗세대까지 신선식품 온라인 주문이 보편화 되었다는 분석이다.  


코로나 발발 이후 흥한 앱들 중 상당수가 알리바바(阿里巴巴) 텐센트(腾讯) 바이두(百度) 바이트댄스(字节跳动) 등 중국 IT 대기업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텐센트는 코로나 수혜를 본 앱의 지분이 가장 높은 회사다. SNS, 뉴스 정보, 게임, 동영상 등 영역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알리바바 산하 ‘허마’는 신선식품 배달앱 가운데 이용자수 증가율 1위를 차지했다.


중국 IT업계 양대 B라 불리는 바이두(百度)와 바이트댄스(字节跳动)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바이트 댄스는 산하에 쇼트클립앱 틱톡과 뉴스정보앱 진르터우탸오를 모두 보유하고 있어, 이번 코로나 모바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대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724282?cloc=joongang-mhome-Grou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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