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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May 30. 2023

당신이 에이엄브렐라를 알아야하는 이유

0.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 글은 전문성이 전혀 없는 무성애 당사자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따라서, 이 글만으로 모든 무성애/무연정 우산에 있는 이들을 이해했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연정자 혹은 무성애자의 경험은 다르고 정체성의 세부적인 양상 또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 글이 A-umbrella의 추상적이고 대략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에이엄브렐라를 아시나요?


 에이엄브렐라/에이로엄브렐라는 무성애(asexual), 무로맨틱(aromantic) 스펙트럼에 있는 여러 정체성을 이르는 말로 인터넷상에서는 흔히 ‘에이엄’이라 줄여 부른다. 이렇게 설명하면 독자의 대부분은 그래서 무성애 혹은 무로맨틱이 무엇이냐 되물을 것이다. 사실 무성애와 무로맨틱 내에는 세부적으로 매우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고, 이것들이 논의되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특히, 국내는 더더욱) 사람마다 다른 단어를 선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본적인 개념과 국내에서 제일 흔하게 통용되는 개념들만 설명하겠다.


 무성애는 성적지향 중 하나로서 다른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아예 않거나, 매우 드물게 느끼는 성적 지향이다. 무성애의 반대항은 유성애 이고 여기에 흔히 아는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이 속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제 여러분은 성적 끌림이 그래서 뭔데? 라는 의문점을 품을 것이다.

 성적 끌림(sexual attraction)은 소위 말해 ‘내가 특정인과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다. 무성애 스펙트럼에 속하는 이들은 저 문장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이 들어맞지 않는다. 일단 아예 누군가와 함께하는 성적 행위에 대한 욕구가 전무한 경우, 특정인이 매우 매우 적을 경우, 혹은 그 상황에 본인이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경우 등등이다.

무로맨틱(무연정)은 로맨틱 지향 중 하나로서 역시 다른 이들에게 로맨틱 끌림을 아예 느끼지 않거나, 매우 드물게 느끼는 로맨틱 지향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에 ‘성적’ 대신 ‘로맨틱한(연정적)’을 넣으면 된다.

 이런 정체성들내에는 다양한 세부 정체성이 있고 그것들을 통틀어 각각 무성애 스펙트럼 혹은 무로맨틱(무연정)스펙트럼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통칭하여 에이엄(A-umbrella)라고 하는 것이다. 에이엄브렐라 커뮤니티 내에서는 그 밖의 이들을 흔히 제드(A와 반대에 있다 하여 Z)라고 한다. 유성애, 유로맨틱 대신 제드섹슈얼, 제드로맨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에이엄에 관한 흔한 오해들을 정정해주고 이 부분은 마무리하겠다. 일단 무성애는 무성욕이 아니다. 물론 성욕을 거의 느끼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성욕의 유무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니 무성애자들의 성 기능을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두 번째로, 행위와 정체성은 구분된다. 연애를 했다고, 섹스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제드는 아니다. 에이엄내의 인간들도 연애하거나 섹스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즐기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는 행위가 통상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는 있어도 ‘통상적인’ 기작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어쩌면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내가 찾은 최선의 설명이다.


2. 당신이 이들을 더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 ; 자기 확립


 이 이해도 안 가는 설명을 읽은 여러분 중 대다수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거나 어쩌면 진지하게 “이런 사람이 있다고?” 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에 위의 설명을 읽다가 “오? 이거 나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에이엄브렐라에 속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상당할 것이다.


 당사자라면 에이엄브렐라에 대해 아는 것이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하다. 많은 A들이 정체화 전까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이상하다고 느끼며 혼란을 겪는다. 에이엄브렐라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런 느낌을 느끼는 이가 자신만은 아니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국내 무성애자들간의 커뮤니티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커뮤니티에 속해보는 경험은 동질감을 나누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던 고충을 나눌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정체성이 가시화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부정하고, 이성애 혹은 유성애규범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바란다.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에이엄브렐라에 대한 이해는 도움이 된다. 유성애 개중에 특히, 이성애가 당연한 이 사회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유성애에 대해서 고찰하기 힘들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끌림을 느끼는 사람인지 명명할 기회가 없다. 너무 당연해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에이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도 확실히 정립할 수 있다. 로맨틱 끌림이나 성적 끌림 외에도 에이엄 커뮤니티에서는 다양한 끌림의 형태를 명명하고 그 양상을 분석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끌림에는 센슈얼, 플라토닉, 얼터러스,에스테틱 끌림 등이 있다.  끌림의 종류와 이에 따른 분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이러한 분류가 안맞는 이들도 있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끌림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번외: 21세기 20대 초반이 에이엄으로 살아가기


 이 글을 쓴 본인은 무성애 개념에 대해 16살에 처음 접하고, 19살 때 정체화를 하였다. 무로맨틱 무성애자이지만, 연애나 성적인 것에 극심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쩌면 ‘보통의’ ‘평범한’ 이성애자처럼 위장하고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은 이런 정체성을 알고 있다.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대부분은 놀라진 않았다. 적어도 나는 한 번도 연애 이야기에도, 성적인 이야기에도 열을 올린 적이 없고, 꾸밈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커밍아웃을 들은 친구들 중 반 정도는 그 자리에서 내게 “너무 얽매이지마. 나중에 바뀔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을 기어코 건넸다. 정체성을 알고, 내가 그런 범주의 사람이라는 것도 납득하지만, 언젠가는 이성연애를 할 것을 가정한다. 그런 말들에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 그냥 좀 잣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와 가까운 이들에게서 제드중심적인 발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늘 덤덤하게 소외된다. 소외감을 티 내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것이 내가 그들을 아끼는 방식이기에 언젠가부터는 늘 그렇게 살고 있다.


 보호자를 비롯해 그 나잇대의 어른들에게는 한번도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어쩌면 보호자들은 이미 알지도 모른다. 같은 집에 살며, 내 방에는 퀴어 도서가 꽤 있고, 통화내용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 같이 사는 보호자 중 한 명은 내게 “네가 동성애인을 데려오건, 외국인을 데려오건 상관없다. 그냥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이성 친구를 -아마 퀴어인 친구가 되겠지- 연애 상대로 보호자들에게 확인시켜줄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어차피 속일 거라면, 그들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불필요한 간섭도 피할 겸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속이고 살아갈 것이다. 이게 내가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방식이기에.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떠한가.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을. 내 주변인들에게서 보이는 세상의 편견을 깨뜨리면서까지 이해를 받아내고 싶지 않은 것을.






그럼에도 언젠가는
모든 제드들이
다양한 A들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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