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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 : 공화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

by 삼중전공생 Mar 04. 2025


Man was born free, and everywhere he is in chains. 
Many a one believes himself the master of others, and yet he is a greater slave than they.

- The Social Contract, J.-J. ROUSSEAU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쇠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제1장에 등장하는 첫 구절입니다. 왜 루소는 모든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봤을까요? 플라톤의 정치 체제 분류에 따라 생각해봅시다. 모든 사람은 그 분류에 따른 정치 체제 중 반드시 그리고 오직 한 가지에 속해서 살고 있다고 해봅시다.


먼저 군주정은 어떤가요? 이때 당신은 군주의 의지에 따라 지배되고 있으므로 당신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럼 과두정은 어떤가요? 그건 단순히 당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여러명 늘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민주정은 어떨까요? 루소는 민주정 또한 당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단순히 사회의 모든 사람이 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정에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할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회상태에서 인간은 부자유할 수밖에 없나요? 이 물음이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의문이자, 루소가 이 저작을 쓴 주된 까닭이  됩니다. 이 글을 모두 읽고 난 뒤에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권리는 힘이 아니라 계약에서 나온다


모든 권리는 의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혹은 어떤 행동을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은, 상대방이 나의 어떤 것을 존중하거나 나의 행동에 따라야만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힘을 권리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내가 숲 속에서 총을 든 강도를 만난다면, 나는 강도의 힘 때문에 지갑을 내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양심적으로 지갑을 내줄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강도가 가진 권총이라는 물리력을 하나의 권리로 생각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지만 상식적으로 우리는 강도에게 지갑을 내줄 '의무'는 없습니다. 권리란 의무를 지는 상대방의 동의에 기초해 성립하는 것입니다.


둘 이상의 사람이 어떤 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 사람들 간에 권리에 따른 의무를 지기로 한 동의와 누군가 권리를 보유하게 된다는 인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2. 노예 계약이 모순인 이유


노예 계약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남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대가 없이 그저 남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타인의 피지배민이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아마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불가역적으로' 양도한 사람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온갖 착취와 강탈을 당해도 항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이성적인 사람이 할만한 내용의 계약이 아닙니다.


결국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성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는 전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타인의 완전한 노예가 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설령 노예 계약을 했다고 해도, 그 계약이 자신에게 더 이상 이롭지 않다면 파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계약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계약을 한 경우라면 이성적인 인간이 한 계약이 아니므로 무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파기하여 자유민이 될 수 있는 노예 계약이라면, 그것을 더 이상 노예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노예 계약이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며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간만 확장해보면 또다른 함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로티우스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양도해서 다른 주인의 노예가 될 수 있다면, 인민 전체가 그들의 자유를 양도해서 국왕의 백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국왕이란 독재자로 바꿔 읽어도 무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예 계약이 모순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산재된 갖가지 왕정이나 독재정이 모두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도 알 수 있게 됩니다.



3. 공동체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


사람은 국왕이나 독재자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일종의 노예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시 시대처럼 각자 떨어져 밀림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주는 이점을 챙기면서,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방법을 고안해내야 합니다.


루소는 자신의 자유를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정치체를 구성하면서도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롭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이렇게 공동체 전체에 양도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의지를 루소는 '일반 의지'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일반 의지는 개인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특수 의지와는 다릅니다. 일반 의지는 공공의 이익을 좇지만, 특수 의지는 특수한 이익을 좇습니다.


만약 개인이 특수한 이익만 좇는다면 그가 공공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마치 무상으로 기부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남이 입는 손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 한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곧 멸망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계약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일반 의지에 대한 복종을 거부한다면 공동체가 그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건 시민들이 자유롭기를 강요한당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강요'라는 것은 쉽사리 악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의 해석에 유의해야 합니다.



4. 일반 의지와 전체 의지의 차이


일반 의지는 개인들의 다양한 이익 사이에서의 일치되는 부분을 지향합니다. 때문에 일반 의지는 언제나 올바릅니다. 하지만 인민의 의결이 언제나 올바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행복을 바라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현명하게 가려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 의지를 따르지 않고 특수 의지의 총합일 뿐인 전체 의지를 따른다면 공동체는 잘못된 이익을 좇는 오류를 충분히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일반 의지는 저마다 합리적으로 추구되는 특수 의지들의 적절한 교집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반 의지를 올곧게 추구하기 위해서는 '당파'를 만들면 안 됩니다.



5. 당파를 만들면 안 되는 이유


그 당파 내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지만, 공동체에 대해서는 특수한 이익을 좇습니다. 따라서 일반 의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당파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무리지으면 안 됩니다. 각 개인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숙고해보고,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만 심의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물론 의지를 일반화하는 것은 투표의 수가 아니라 공통의 이해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런 투표 결과마저도 곧이 곧대로 따라서는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흔히 알려진 바와 다르게 루소와 숙의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상극인 이유입니다.



6. 일반 의지와 법


일반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서 생겨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일반 의지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일반적이어야 합니다. 개별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일반 의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이 특권의 존재를 정할 수는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하여 특권을 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개별적인 대상과 관계하는 기능은 모두 입법권에 속하지 않습니다. 주권자라고 할 지라도 개별적 대상에 대해서 명령한다는 것은 법이 아니라 순전한 명령에 불과하게 됩니다. 인민 모두가 공동으로 제정한 법으로 다스려지는 국가는 그 행정 형식이 어떻든 모두 공화국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이제 루소가 한 말의 의미가 좀 더 와닿을 거라 믿습니다. 한편 루소가 말한 '해법'은 어떤 것이었는지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루소를 비판적으로 읽기


그럼 이제 우리는 루소를 비판적으로 읽을 차례입니다. 루소는 일반 의지에 반하는 사람의 의지는 강제로라도 복속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특수 이익만 좇는다면 공동체가 공중 분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소는 그렇게 일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강제로 복속시키는 것이 그 사람을 강제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공통된 이해인 일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할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 자신의 이익도 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까 살펴봤듯이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비이성적이라서 진정한 행복을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불행한 착각에 빠진 사람의 진정한 의사는 진정한 행복을 좇는 것일테니 그 사람의 진정한 의사에 맞도록 그 사람의 행동을 강제하여 그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도록 돕는 것은 마찬가지로 강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존속이 그 사람의 진정한 이익에 부합하고, 일반 의지 또한 그 사람의 특수한 이익의 부분일 수 있다면 공동체를 존속시키고 일반 의지에 복속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한 의지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엄밀한 의미의 강요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유롭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썼던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게시글에서 봤듯이 나의 진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와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로 '진정한 이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일반 의지가 특수 이익들의 산술적 교집합으로서의 공통 이익을 좇는 의지일지라도 일반 의지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더 나을지, 특수 이익 중 다른 부분 집합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굳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의 이익과 선호를 가장 잘 알고 있고, 나의 상황과 가진 자원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사람일텐데, 그건 공동체의 통치자라기 보다는 바로 나 자신일 것입니다.


롤스는 루소를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적지 않은 공화주의자들은 루소를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러셀 같은 사람은 루소를 전체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정치학자들은 대표적인 민주주의 연구자로 루소를 꼽곤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건 바로 루소의 '자유' 개념이 상당히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루소에 대한 정당한 비판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령 루소는 일반 의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충분히 동질적이고 공동체의 크기가 작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공동체의 순결성을 유지하는 매커니즘이 때로는 얼마나 폭력적인 것일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비교적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옮기지 않은 '입법자' 파트는 마치 '현명한 수령의 령도'마저 떠올리게 만듭니다.


물론 제가 이 글에 옮긴 루소의 사상은 루소의 전체 사상 중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곳에에 옮겨진 내용만 보고 루소의 견해를 피상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권장할 만한 태도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차후에 루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 이해를 돕는 배경지식이 될 순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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