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만났던 낯선 사람들의 친절

by 경희
여행길에서 만났던 낯선 사람들의 친절은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_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김윤성 저, 푸른향기)_p45



#파리 1

유로스타를 타고 악명 높은 파리 북역에 도착하였다. 숙소까지 어떻게 이동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무시무시한 소매치기 후일담을 읽노라니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택시냐 지하철이냐.

기차역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려고 하니 치안이 염려스러웠다. 단적으로 비싸다. 지하철은 나비고를 이용하면 추가로 드는 요금이 없었지만 환승을 한 번 해야 했다. 여행지를 한번 옮겼을 뿐인데도 꽤 무거워진 캐리어 때문에 망설여졌다. 엄마가 무엇을 선택할지 알면서도 나는 엄마에게 선택권을 넘겼고, 못 이기는 척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블로그에는 나비고를 발급받는 부스에 다다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주요 기점들이 친절하게 나와있었다. 길이라면 기가 막히게 잘 찾는 나였지만 파리 북역의 악명에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플랫폼에서 쭉 걸어 나와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된다는 글을 보았다. 그럼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엄마에게는 자신만만하게 굴었지만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더 콩닥거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바로 앞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나는 속으로 기쁨에 겨워 소리 질렀다. 이렇게 쉬운 걸 두고서 마음고생을 한 것이 무안할 정도였다.

24인치 캐리어를 두 손으로 한껏 치켜들고서 계단을 오르내린 끝에 지하철을 탔다. 허리가 꽤 뻐근하였다. 엄마는 힘든 내색 하나 없으셨다. 숙소 근처 지하철 역에 도착하여 출구에서 생각지도 못한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우리는 환호했다. 캐리어를 가뿐하게 올린 후, 두 발도 가뿐하게 올렸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가 도중에 멈추어 섰다. 엄마와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을 마주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Madame, may I help you?"


금발 머리의 키가 큰 청년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Merci, thank you."

청년은 엄마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뒷모습이 세상 그 어떤 히어로보다 든든하였다.

숙소에 도착한 후, 간단하게 짐 정리를 하고 장을 보러 나섰다. 스페인 마트에서 오렌지 착즙 기계로 값싼 가격에 직접 주스를 내려서 먹었던 행복이 컸던 지라 혹시나 하고 알아보니 프랑스 마트에도 아침에 간편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렌지 착즙 기계가 있다고 하였다. 아침을 훌쩍 넘긴 오후라서 착즙기는 천으로 덮여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트가 나타나면 눈을 돌렸는데 유리창 너머로 오렌지 착즙 기계가 보였다. 다른 마트에서 장을 본 것을 들고 가는 게 맘에 걸려서 엄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하였다. 오렌지 주스를 짜는 기계 앞에서 헤매고 있는데 어느새 점원이 와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오렌지 주스를 담은 플라스틱 병을 들고서 신이 나서 나오니 엄마는 지나가던 행인이 인사를 건네더라고 하였다. 나는 마트에서, 엄마는 길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걷다가 오는 길에 보았던 빵집에 들렀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크루아상을 주문하며 S'il vous plaît를 덧붙이자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지으셨다. 판매자는 소비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서로가 동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던 터라 Bonjour, Merci, S'il vous plaît를 되뇌고 또 되뇌었는데, 그 노력이 미소로 화답을 받은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파리가 좋아진 이유의 팔 할은 사람이다.



#파리 2

로댕미술관은 정원이 예뻐서 날이 좋은 날이면 정원만 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화창한 날에 꼭 가야지 했는데, 창문으로 햇살이 눈이 부시게 들어왔다. 바로 오늘이다. 숙소에서 가까운 거리라서 걸어가기로 하였다. 포스터의 산뜻한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에 담았다.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을 막 마친 아저씨와 기분 좋은 미소를 나누었다. 맛있는 빵 냄새가 솔솔 풍겨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빵집으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거리의 풍경과 맛을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극성수기 시즌이었지만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간 덕분인지 줄이 없었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로댕이 살아있을 적에는 저택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대 부와 명성을 날린 로댕은 어떤 곳에서 살았을까 궁금하여 통합권을 구입하였다.

유리창으로 햇살이 내리쬐어 실내는 포근하게 느껴졌다. 황홀경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에 매료되어 한참이나 넋을 놓고 본 작품이 있었다. 벨기에 병사를 모델로 했다는 짤막한 설명이 있었다. 근래에 책을 읽다가 우연찮게 이 작품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조각가가 낸 이 생동하는 조각상은 주의를 끌기 시작했고, 로댕이 실제로 그 작품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실물에서" 본을 떴다는 소문이 또 다시 돌기 시작했다.

_벨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메리 매콜리프 저, 최애리 역, 현암사)_p122


내가 보고 느꼈던 바가 아직까지도 생생하여 그 당시의 터무니없는 소동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감상을 공유했다는 전율이 일었다.

IMG_7600.JPG

작품을 보고 난 들뜬 감정을 안고 기념품샵으로 갔다. 그림엽서를 보고 또 보고,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2장의 엽서를 골랐다. 4.9유로로 가격이 사악했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달린 연필도 큰 맘먹고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맞은편에 계시던 아저씨가 내가 메고 있던 가방에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가방이 멋지다. 어디 가방이냐. 그림이 예쁘다. dream tomorrow 문구가 좋다.

나는 살짝의 경계심을 품고 짧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그림과 잘 어울릴 거라고 하시며 계산대 앞에 있던 배지 하나를 집으시더니 손수 내 가방에 달아주셨다. 타의로 배지를 사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난감하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본인이 계산을 하겠다고 하셨다. 모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건네는 마음 씀씀이에 놀라서 얼떨떨하였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나서 내가 받은 소중한 마음을 곱씹다 보니 행복이 번져 얼굴이 환히 피어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이 지칠 때면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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