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푸에르토 마데로에서 시작된 하루

낯선 러닝코스, 기억을 담은 서점, 그리고 따뜻한 저녁 식사까지

by 신정호
역사 속을 달리다 – 푸에르토 마데로의 아침 러닝

오늘은 조금 특별한 아침 러닝을 떠나보기로 했다. 늘 달리던 팔레르모 공원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 정한 곳은 푸에르토 마데로(Puerto Madero). 부에노스아이레스 동쪽 강변에 위치한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 도시의 첫 항구였지만, 이후 물류 기능을 신항구에 넘기며 한동안 방치됐던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며,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 고층 오피스, 공원과 산책로가 조화를 이루는 신도심의 얼굴로 탈바꿈했다. 과거와 현재, 쇠락과 부활이 공존하는 공간. 그런 이유로 이곳은 단순한 부촌 그 이상이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거리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단정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웅장한 동상이었다. 그 앞에서 러닝복 차림으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페론 대통령(Juan Domingo Perón)의 동상이었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그리고 다시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복지를 확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지도자였다.


특히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과 함께한 민중 중심의 정치 행보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포퓰리즘 정치와 과도한 경제 개입으로 장기적인 경제 위기를 불러온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공과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라는 그런 설명은 책에서도, 기사에서도 수없이 접했지만, 막상 그의 동상 앞에 실제로 서보니, 마음 한 켠에서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만약 그가 경제를 조금만 더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더라면, 이 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상념을 품으며 고개를 들어 다시 동상을 바라봤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 찬반을 떠나, 어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묵직한 존재감이 분명 있었다.


조용히 동상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의 상징을 지나, 나는 이제 또 다른 얼굴을 향해 달려간다. 강과 도시가 만나는 곳, 푸에르토 마데로의 강변. 그곳에서는 과거의 그림자 대신, 이 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재의 얼굴이 펼쳐질 것이다.



다리 위에 담긴 감성 – ‘여성의 다리’를 바라보며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저 멀리 독특한 실루엣의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푸에르토 마데로의 상징적인 구조물 중 하나인 ‘여성의 다리(Puente de la Mujer)’였다. 이 다리는 2001년, 스페인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에 의해 설계된 작품이다. 세계 곳곳에서 유기적이고 조형적인 구조물로 유명한 그가,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에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낸 것이다.

처음 마주한 순간, 정말 신기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다리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어떤 동작을 멈춘 듯한 조각처럼 보였다. ‘이 다리는 대체 어떤 형상을 본뜬 걸까?’ 찾아보니 놀랍게도, 탱고를 추는 한 쌍의 남녀의 동작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순간, 감탄이 절로 터졌다. 무채색 강철 구조물 안에 감정을 담아낸다는 것. 이 다리는 그 자체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술이자 정체성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 다리는 단지 조형미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도개교(bascule bridge)’, 즉 다리를 회전 혹은 들어 올려 선박이 지나갈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이었다. 특히 이 다리는 교각을 중심으로 다리 전체가 90도 회전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보통 도개교는 수직으로 들어 올려지는데 이 다리는 수평으로 회전하여 한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마치 탱고의 스텝처럼, 묵직한 리듬 안에 감춰진 우아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다리였다.

그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흰색 교각이 처음엔 왜 저기 있나 싶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리가 회전 후에 지지되는 교각이었다. 기능과 상징, 기술과 미학이 하나로 녹아든 구조물. 엔지니어로서 이 다리를 설계한 사람의 창의성에 진심 어린 경외감이 들었다. 언젠가 이 다리가 실제로 열리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주로 야간 시간대, 특정 화물선이나 점검 시에 회전한다고 한다. 만약 언젠가 이 도시를 다시 찾는다면, 바로 이 다리가 움직이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내 작은 소망 중 하나일 것이다.


다리를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기울어진 흰색 주탑은 남자의 손짓 같기도, 여자의 몸짓 같기도 했다. 정지된 구조물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를 리드하며 춤추는 연인의 모습처럼 유연한 실루엣이 떠올랐다. 아르헨티나,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여기서는 이렇게, 도시의 구조물조차 탱고처럼 섬세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달리는 자만이 만나는 아침의 풍경

다리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본격적인 푸에르토 마데로의 러닝 코스가 펼쳐졌다. 넓고 잘 정비된 보행자 도로가 강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 강 너머로는 낮은 수면과 높은 하늘이 나란히 달리는 듯한 풍경이 계속됐다.

거대한 강변을 따라 걷고 뛰는 이 길은, 지금까지 내가 달렸던 그 어떤 코스와도 달랐다.
그동안의 러닝 코스가 동네 공원 속 작은 루트였다면, 여기서는 도시의 숨겨진 풍경 안을 달리는 듯한 자유로움이 있었다. 탁 트인 시야,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어디선가 전해지는 부드러운 선율처럼 흐르던 강의 표정. 도시는 조용했고, 대신 풍경이 말을 걸어왔다.

러닝 중간에는 마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노란색의 거대한 기중기들이 등장했다. 너무 정교하게 만들어진 탓에, 순간 로봇 형제들이 잠시 멈춰선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옆으로는 다양한 조형물과 설치 작품들이 놓여 있었고, 그 속을 달리는 나 자신조차 한 장면 속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푸에르토 마데로는 분명, 사람들이 많이 찾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하지만 이른 아침의 이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광장을 조용히 가로지르고, 커피를 손에 든 이들이 하나둘 출근길에 나서는 걸음 속을 지나치며, 나는 이 도시의 하루가 깨어나기 직전, 마지막 숨을 고르는 순간을 달리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시작된 러닝. 물론, 새로운 코스를 찾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수고로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길을 찾아 헤매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만드는 것. 하지만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고 도착한 이 아침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선물 같았다.


붐비는 시간대였다면 놓쳤을 풍경, 소리 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은, 오직 아침 러닝을 나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오늘, 그 특권을 내 것으로 만든 내가, 문득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분홍색의 비밀과, 시간의 겹침

러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버스 정류장을 찾아 걷던 중 낯익은 외관의 건물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카사 로사다(Casa Rosada), 이름처럼 분홍빛 외벽이 인상적인 아르헨티나의 대통령궁이었다. 푸에르토 마데로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지는 미처 몰랐다.

건물의 뒷마당을 스쳐 지나가며,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왜 하필, 분홍색일까?" 궁금증에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분홍은 19세기 아르헨티나 정치의 두 세력, 중앙집권주의자들의 상징색인 붉은색과, 연방주의자들의 상징색인 흰색을 섞은 색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분홍빛은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었다.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정치 세력이 결국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상징. 즉, 갈등을 넘어 화합을 상징하는 색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껴졌던 분홍색 외벽이 이 도시의 복잡한 역사와 그 속에 담긴 바람을 품은 얼굴처럼 다가왔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씩 찾아가며 이해해가는 이 과정 자체가 여행 중에만 얻을 수 있는 작고 조용한 기쁨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잠시 걸음을 옮겨 마요 광장(Plaza de Mayo)에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강변에서의 러닝 여운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내 옆에 와 멈췄다. 그들 앞에 선 가이드는 카사 로사다의 발코니를 가리키며 에바 페론(Eva Perón)이 바로 저곳에서 연설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자,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에서 여성과 노동자 계층을 위한 권익 신장에 앞장선 인물이다. 사회복지 제도의 확대, 여성 참정권 확보, 병자와 빈민을 위한 활동 등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그녀는 1951년, 대통령 후보 사양 연설을 저 발코니에서 했다.


실제로 영화 『에비타(Evita)』에서도, 그녀가 흰 드레스를 입고 군중 앞에서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부르던 장면이 바로 저기에서 재현되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떠난 뒤, 나는 건물 가까이 다가가 경비 중이던 경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번역기를 꺼내 물어봤다. "저 발코니가 정말 에바 페론이 연설했던 곳인가요?"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Sí, es ahí." “그래요, 바로 저곳입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작고 평범한 발코니. 하지만 그곳에서, 한 시대의 상징이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생각에 가슴 속에서 묘한 떨림이 일어났다. 시간은 흘렀고, 이 광장을 채우는 사람들의 얼굴도, 옷차림도, 언어도 모두 바뀌었지만 그날의 목소리와 울림은 아직도 이 공간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 앞에 잠시 서 있는 일.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충분했다.



기억을 붙잡는 마음 – 서점에서의 사진 한 장

오후에는 여느 날처럼 Libros del Pasaje 서점에 들렀다. 이곳은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자주, 가장 편안하게 찾는 공간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딱 그 정도의 거리. 늘 그렇듯, 카페 라떼 한 잔을 옆에 두고, 나무 테이블에 앉아 업무와 공부에 몰입하는 이 조용한 리듬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높은 천장까지 빼곡히 꽂힌 책들, 그 사이사이 놓인 사다리, 그리고 사다리에 올라 천천히 책을 꺼내는 사람의 움직임.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어느 순간, 기억 속의 장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 공간에서 보낼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순간을 미리 붙잡아두고 싶었다. 헤어지기 전 몰래 사진 한 장 더 남기는 연인의 마음처럼. 떠날 준비를 하며 슬며시 마음속 정리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언젠가 이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의 공기, 커피의 향, 책 넘기는 소리,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나의 표정까지 그대로 떠오르지 않을까. 마치 순간이동처럼. 지금의 내가, 다시 이 서점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기분. 그 장면을 마음에 붙잡고, 나는 천천히 책장을 덮었다.



이방인의 식탁 – 정성과 나눔의 저녁

해가 저물 무렵,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오늘은 이곳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부부를 내 숙소로 초대한 날이다. 장보는 일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와인 코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이곳의 대표 와인, 말벡(Malbec). 말벡은 프랑스 남부에서 유래한 품종이지만, 아르헨티나의 고산지대에서 재배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와인이다. 가격대도 다양해서 부담 없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기에 이런 날에는, 한 병쯤 들고 가기에 딱 좋았다.

맥주 코너에선 화려한 라벨이 붙은 지역 맥주 몇 캔도 함께 담았다. 이곳의 맥주는 종류도 다양하고 패키지도 개성 넘쳐, 고르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경사진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형형색색의 과일들을 지나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색감이다. 괜히 하나쯤 더 사고 싶은 마음, 그게 여행지의 마트 풍경이 주는 작은 유혹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선 나름대로 진지하게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없는 요리 실력이었지만, 정성만은 가득 담아 부침을 부치고, 미역국을 끓이고, 불고기도 준비했다. 누군가를 초대하는 식사라는 건, 메뉴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법. 그래서 오늘 저녁은, 그 마음을 담아 나만의 진수성찬으로 차려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미역국을 함께 나눴다. 그들이 정말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며,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걸 보며, 어렸을 적 우리가 밥을 잘 먹을 때 뿌듯해하시던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었다.


식사 중엔 자연스레, 우리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방인으로서 이 낯선 도시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 깃든 특별함을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여전히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천천히 찾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오기까지의 망설임이 컸던 만큼, 여기서 얻고 싶은 것도 크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는 것.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어서 더 열심히 찾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믿음이 지금 이 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크게 특별한 사건이 없었던 하루였지만, 그 하루가 또 하나의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작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특별함의 힘이 아닐까? 그리고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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