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의 러닝, 원격 업무, 그리고 소고기와 오이소박이
팔레르모 공원에서 맞이한 늦은 아침
밀롱가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침 늦게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귓가에는 어제 들었던 반도네온의 선율이 희미하게 맴도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여유롭게 공원으로 나가보니, 평소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아침 공기는 여전히 선선했지만, 공원 곳곳에는 활기가 넘쳤다. 삼삼오오 모여 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이들은 롤러블레이드 장애물 연습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차에 운동기구를 싣고 와 소규모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오랜 친구들이 모여 함께 운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동하며 운동을 지도하는 비즈니스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렇게 넓은 공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가는 큰 장점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운동이 단순히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하나의 문화처럼 보였다. 몸을 단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한참을 걷다가, 팔레르모 공원 안에 있는 장미정원(Jardín de Rosas)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곳은 공원 안에서도 마치 섬처럼 조성된 특별한 공간이었다. 장미가 만발하는 계절이 아니어서인지, 꽃이 많이 피어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꽃이 없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고요하게 흐르는 호수, 정원 사이를 거니는 몇몇 사람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곳만큼은 공원의 활기찬 에너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혼자 조용히 산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곳에는 개방된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공공장소에도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아 늘 고민이었는데, 운동을 하다가 멀리 가지 않고 들를 수 있는 곳을 발견한 것이 반가웠다.
달리기를 마치고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들을 한참 지켜봤다.
그들은 때로는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고, 때로는 잔디밭에 모여 앉아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매일 공원을 오가면서도, 올 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호수에 있지만 그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루틴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이곳에서 작은 루틴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달리고, 걷고, 일하고, 요리하며 보내는 일상. 이 도시에서의 삶이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프로젝트에 몰두한 날
오늘은 외출 없이, 프로젝트에만 집중하는 날이었다. 3월 말에 진행될 LG인화원과의 교육과정 개발 보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과제는 생성형 AI를 제조 현장의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절차를 수립하는 작업으로,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실제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하는 실용적인 프로젝트였다. 중간중간 진행 보고를 해야 하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하루. 그래도 이렇게 원격으로 과제를 수행하고 보고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달 살기를 떠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일할 때 일부러 환경을 바꾸는 편이지만, 오늘은 숙소에서도 충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넓은 책상 위에 자료를 펼쳐두고, 오롯이 일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문득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늘 일하는 공간 같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한, 이곳이 한국이든, 부에노스아이레스든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문을 나서기만 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 이 점이 지금의 내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가 아닐까?
사실,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도 업무를 보기에 적절한 환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간 구분이 없는 원룸 형태였다면, 이렇게 장시간 집중하는 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일과 쉼의 경계가 분명해야 생산성이 유지된다는 걸 이번에도 새삼 깨달았다. 숙소를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디지털 노마드의 삶. 언제 어디서든 노트북만 있으면 일할 수 있다는 것. 많은 이들이 꿈꾸는 방식이지만, 막상 이렇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준비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강의와 컨설팅이 주 업무라, 온라인만 연결된다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원격으로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래서 출국 전에 지인들에게 미리 미션을 나눠줬고,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이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는 만큼, 이를 충당할 전략을 잘 세워야 지속 가능한 방식이 될 것이다. 자유롭게 일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정말 지속 가능하려면, 그만큼 치밀한 계획과 실행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한 하루였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결정하다
원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서만 생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UBA) 미팅에서 만난 교수님께서 불쑥 물으셨다. "파타고니아 여행은 갈 거예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계획이 없다고 하자 교수님은 "꼭 가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하셨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가야 하는 곳일까? 이 먼 곳까지 와서, 그저 도시 안에서만 머물다가 떠나는 게 맞을까? 고민 끝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주말을 피해서 조금 더 여유롭게 다녀오기로 하고, 2월 26일(수)~29일(금) 일정으로 비행기표를 먼저 끊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타고니아 지역의 관문인 엘 칼라파테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 이 정도면 한국에서 몽골을 가는 거리와 비슷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르헨티나는 정말 넓은 나라구나.
이번 여행의 목표는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 하이킹. 빙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TV에서 보던 거대한 빙하의 벽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나는 원래 등산을 좋아한다. 매년 친구와 함께 설악산과 지리산 정상 산행을 다니고 있었다. 등산화가 없더라도 운동화를 신고라도 피츠로이에 오르고 싶었다.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가끔은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 일정을 확정하고 싶었다. 비행기 표를 결제하는 순간, 이제는 무조건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떠날 준비가 끝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은 몇 번 다녀왔지만, 숙박까지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말. "여행 속의 여행." 이 표현 자체가 멋지지 않은가? 한 달 살기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 여유롭게 일정을 정하고, 충분히 준비하고, 그리고 진짜 모험을 떠나는 것. 이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내일을 위한 저녁 준비 – 소고기와 오이소박이 만들기
저녁 무렵, 슈퍼마켓에 들러 소고기와 오이를 샀다. 요즘 매일같이 소고기를 먹고 있다. 이러다 소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질 좋은 소고기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는 마음껏 먹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소고기 코너에 가니 수십 가지의 다양한 부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익숙한 부위라도, 이곳에서는 이름만 봐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MILANESA DE BOLA DE LOMO'—도대체 어느 부위일까? 하지만 겉보기엔 신선하고, 충분히 맛있어 보였다.
이곳의 소고기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 달리 기름기가 적고 살코기가 많은 편이다.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소를 넓은 초원에서 방목하여 키우기 때문에, 지방이 적고 근육이 단단하게 발달한 고기가 많다고 한다. 방목된 소들이 뛰놀며 자란 광활한 평원을 떠올리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고기가 그 푸른 초원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오이소박이를 다시 만들었다. 내일 한국인 친구들을 숙소로 초대했기에, 넉넉하게 준비하기로 했다. 지난주에 한 번 만들어 본 덕분에 이번에는 손이 훨씬 익숙하게 움직였다. 양념을 버무리고, 오이에 정성스럽게 속을 채워 넣었다. 다 만들어 숙성을 위해 통에 담아두고 나니, 기분이 묘하게 뿌듯했다. "이제 오이소박이쯤은 문제없겠는데?"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기술을 익힌 느낌이었다.
나는 원래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는 이렇게 직접 요리해서 먹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든다. 직접 만든 음식이 더 건강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온전히 내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운동하고, 일하고, 음식을 만들고, 여행 계획까지 세운 하루. 어느새 이곳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는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여행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서 종종 먹던 고등어 김치찜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