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25km, 파타고니아의 심장에 닿다
엘 찰텐으로 가는 여정과 시작된 트레킹
엘 칼라파떼에서 출발한 첫 버스로 11시 30분, 엘 찰텐(El Chaltén)에 도착했다. '엘 찰텐'은 남미 원주민 마푸체족의 언어로 '연기의 산'을 의미하며, 이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안개 현상을 반영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작은 마을은 파타고니아의 등산과 트레킹의 성지로 불리며, 특히 피츠로이(Fitz Roy, 3,405m)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피츠로이는 세계 3대 미봉 중 하나로 꼽히며, 등산가들에게는 꿈의 목적지와도 같은 곳이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 13시에 숙소를 나섰다. 다행히 이날은 봉우리 근처에 안개가 끼지 않아, 정상에서의 시야가 트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산악 날씨는 예측할 수 없기에, 정상에 도착했을 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 이곳은 피츠로이의 웅장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전망 포인트로, 파타고니아를 찾는 많은 이들이 반드시 오르고 싶어 하는 코스 중 하나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45,000페소(약 55,000원)로,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대신 티켓을 소지하고 다음 날 다시 방문하면 50%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출발 전에 "지금 출발해도 정상 부근의 호수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니, "열심히 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를 향한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반환점, 카프리 호수의 맑은 물 한 모금
티켓 판매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두 개의 갈림길이 나왔고, 등산 코스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보였다. 오늘의 목적지인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까지는 왕복 20km, 예상 소요 시간 8시간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등산을 마치고 측정해 보니 25km 이상이었다.
초반 등산로는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 청계산이나 관악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평범한 흙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출발점에서 점점 멀어지자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은 마치 미니어처처럼 작아졌고, 설산의 봉우리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등산객들이 이미 하산하는 모습이 보였고, 곳곳에서 내려오는 행렬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길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등산로 곳곳에는 재미있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정상까지의 구간을 10등분하여 '10분의 1 지점', '10분의 2 지점' 식으로 표시해 둔 것이었다. 첫 번째 표식을 발견했을 때, 이미 한참을 걸어온 줄 알았지만 고작 10분의 1밖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런데 정작 갈림길에 표시된 이정표에는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남은 거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묵묵히 1시간 20분쯤 걸어가던 중, 마침내 첫 번째 목적지인 카프리 호수(Laguna Capri)에 도착했다. 이곳은 정상까지 오를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환점으로 알려져 있었다. 왕복 3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코스이기에,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곳까지만 올라왔다가 되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호수의 풍경은 마치 그림처럼 이국적이었고, 이곳에서 바라본 피츠로이 봉우리도 정말 웅장했다. 호수의 물은 빙하가 녹아내린 물로, 마실 수 있다고 하여 한 모금 마셔보았다. 특별한 맛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돗물 맛은 아니었다. 잠시 기념사진을 찍고 호수를 감상하며 숨을 고른 뒤, 다시 최종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1시간, 고통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다.
카프리 호수를 떠나 이어지는 길들은 다채롭고 변화무쌍했다. 탁 트인 들판이 나왔다가, 어느새 작은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진 숲길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랜 세월을 견딘 고목들이 늘어선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특히 습지로 이루어진 지대를 지나갈 때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솔길이 운치를 더했다.
중간중간 물길을 건너야 할 때는 겨우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가 자주 나타났다. 마치 모험 게임을 한 단계씩 클리어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걷다가 몸이 조금 지칠 때면, 피츠로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확인하거나, 하늘에 드리운 신기한 구름 모양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리곤 했다. 저 멀리 솟아오른 한 줄기 구름은 마치 산골 오두막의 굴뚝에서 저녁 식사를 짓느라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였다.
갑자기 길이 바위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길도 점점 험해졌다. 이 구간에서는 발을 헛디뎌 발목이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정말이지 등산화를 챙기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을에는 등산 장비 대여점이 많으니, 필요한 경우 꼭 빌려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간중간에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큰 배낭을 멘 백패커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피츠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캠핑장에는 간이 화장실과 깨끗한 호수 물이 있었고, 환경 보호를 위한 주의 사항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의 숲을 바라본다면 또 다른 감동이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3시간쯤 지났을 때, 길가에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하산 중이던 등산객들에게 남은 거리를 물었다. "다리가 튼튼하다면 1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나무로 된 경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이제부터가 진짜 힘든 구간임을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제부터 길이 급격히 가팔라지며 난이도가 훨씬 높아진다는 것, 적절한 신발이 필수이며, 해가 떠 있는 동안 돌아올 수 있을지 시간을 미리 가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경고는 마지막 1km 동안 400m의 고도 상승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1km에 400m 상승이라면, 평균 경사도가 약 40%에 달하는 길. 실제로 이 정도 경사는 일반적인 등산로의 계단보다 훨씬 가파르고, 때로는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야 할 수도 있는 구간이라는 뜻이었다. 경고판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도전의 시작임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후 4시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로만 듣던 마지막 가파른 급경사가 시작되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경사로, 바위가 많은 길, 그리고 젖은 흙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미 체력은 바닥났지만, 무념무상의 상태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오후 4시 50분. 마침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에 도착했다.
빙하 호수의 고요함, 그리고 가장 평화로운 순간
호수 앞에 서자, 눈앞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와 그 위로 우뚝 솟아오른 피츠로이의 웅장한 모습이 모든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해발 1,200m, 이곳에서 마주한 파타고니아의 심장은 정말로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Laguna de los Tres'는 스페인어로 '세 개의 봉우리의 호수'라는 뜻이다. 이 호수에서 보이는 세 개의 주요 봉우리, 피츠로이(Fitz Roy, 3,405m), 포인세노트(Poincenot, 3,002m),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2,558m)는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출발할 때 걱정했던 구름이나 안개도 없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봉우리들은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 호수까지 내려가는 길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본 빙하 호수의 색깔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이 호수 위를 천천히 퍼져 나갔다. 마치 이곳에 온 사람들의 마음속으로까지 스며드는 듯,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풍경이었다. 4시간 넘게 걸어온 10km의 고된 여정이 단 한순간에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든 더 많이, 더 깊이 기억하고 싶었다. 수없이 사진을 찍고,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가, 눈을 감고 상상해 보고, 다시 눈을 떠 바라보고, 또다시 상상해 보기를 반복했다. 마치 이 장면을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곳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가방에서 한국에서 챙겨온 돗자리를 꺼내, 자잘한 돌멩이가 깔린 바닥 위에 펼쳤다. 그리고 그대로 누웠다. 강렬한 태양빛을 모자로 가리고,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할 때라고 일러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이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하산과 석양 속의 마지막 순간
정말 멋진 곳에 오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그런 마음에 "10분만 더, 5분만 더"를 외치다 보니 어느덧 6시가 넘었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왕복 코스를 생각하면 하산해야 할 거리만 10km 이상. 시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휴대폰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상 상황이 생긴다면 누구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긴장감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눈과 가슴에 아름다운 풍경을 가득 담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18시 20분,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 도착한 지 정확히 1시간 30분이 지난 후였다. 호수를 떠나 올라간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돌아보았다.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 그리고 그 위로 솟아 있는 피츠로이의 웅장한 봉우리들. 다음에 또 보자며 친구에게 인사하듯,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하산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다만, 접지력이 작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 미끄러운 구간을 지날 때마다 더욱 신중해야 했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한 순간이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급경사 지역을 지나고 나니 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오랫동안 걷는 것은 그동안의 달리기와 트레킹 경험 덕분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올라올 때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등산로 곳곳에 표시된 1/10 이정표들도 하나하나 찾아 사진으로 남겼다. 올라올 때 찾지 못했던 표식을 발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전체 하산 시간은 약 2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경험해 보니, 해가 지는 시간을 고려하면 최대 18:00에는 하산을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황금빛 석양 아래 걷는 길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드디어,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엘 찰텐의 모습은 마치 미니어처 마을에 LED 전구를 하나씩 밝혀둔 것처럼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걸었다. 호수에서 바라본 피츠로이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이 감동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드디어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21시. 출발한 지 정확히 8시간 만에 원점으로 복귀했다. 하산길에서 멀리 보였던 마을의 작은 불빛들이 이제는 눈앞에서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수고했다고 인사라도 건네는 듯했다.
오늘 하루는 단순히 피츠로이를 만나는 것을 넘어, 파타고니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여정이었다. 정상에서 마주한 에메랄드빛 호수,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들, 그 아래에서 펼쳐진 깊고 고요한 낮잠, 그리고 황금빛 석양을 따라 내려온 길. 모든 순간이 각기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이곳에서의 등산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작은 존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기대했던 순간, 그리고 그 기대를 완벽히 채워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