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화감독은 찌질할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모자무싸

모자무싸.

모든 것들을 줄여서 효율성을 높이는 시대에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역시 #모자무싸라고 부른다. 이게 뭐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쩌겠나, 그게 요즘 시장의 논리인 걸.


영화감독, 아니 정확히는 영화감독 지망생이라고 할 구교환. 갑자기 궁금해졌다. 주인공의 직업이 영화감독인 영화나 드라마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한결같이 내 기억 속 주인공들은 다 어딘가 찌질했다. 잘난 척하고 자존심 센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뒷곁에선 딴짓하고 궁색하고 찌질한.


왜 그럴까? 왜 영화감독의 특성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묘사되는 것일까?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면, 우리는 그 직업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씩 쌓아간다. <베테랑>의 서도철 형사는 지독하게 정의롭지만, <부당거래>의 최절기는 지독스럽게 부패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냉철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안정원은 따뜻했다. <변호사>의 송우석은 정의롭고 영리했지만, <더 데빌스 애드보킷>의 케빈 로맥스는 타락했다. 이렇게 직업은 상황에 맞추어 변주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감독은?


담배. 구겨진 점퍼. 술자리에서 혼자 떠드는 예술론. 전 애인에게 새벽에 문자를 보내는 손. 투자자 앞에서 애써 무릎을 펴려다 결국 굽히고 마는 등. 물론 모든 영화 감독이 그런 것은 아니다. 현실세계에서 보는 영화감독은 스폿라이트의 주인공이었다. 봉준호가, 박찬욱이, 최근에 장항준이 그렇다. 성공한 그들의 어디에도 짠내가 나진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떠올리면 내 기억 속엔 정상적인 영화감독보다는 찌질한 영화감독 뿐이다. 화려한 레드카펫 위의 거장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변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우리가 '영화감독'이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붙이는 수식어가 '예술가'나 '천재'가 아니라, 어쩐지 '나이 들어도 철없는', '자기 세계에 갇힌', '현실 감각 없는'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일까. 왜 하필 그들인가. 그리고 왜 그 찌질한 감독들의 이야기가 왜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것일까?

먼저, 영화 속의 모든 영화 감독이 찌질한 건 아니다. 제법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시네마천국>의 살바토레는 우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들은 결코 쉽게 빛나지 않는다.



2008년, <영화는 영화다>의 봉감독(고창석 분). 실제 조폭을 캐스팅해서라도 영화를 완성하고픈 욕망과, 그 조폭에게 결국 휘둘리는 무력함이 한 몸 안에 공존한다. 현장에서는 총사령관인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현실세계의 그는 무기력함 그 자체다. 2010년,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 속 구남진(이선균 분). 젊은 감독 지망생의 일상은 흐릿하고 초라하다. 그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지만, 그 방식이 번번이 어긋난다. 홍상수는 이 어긋남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냥 들이댄다. 카메라로, 정면으로.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함춘수(정재영 분). 이미 업계에서 인정받은 감독이다. 그런데도 찌질하다. 아니, 성공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찌질하다. 그에게는 변명할 자격도, 실패의 핑계도 없으니까. 그는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이 그렇다는 걸. 그래서 더 부끄럽고, 더 우습다.


2020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이찬실(강말금 분).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감독 옆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프로듀서다. 그녀는 '잘나가는 감독'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닥부터. 그리고 그 바닥이 사실은 진짜 시작이었다는 걸, 영화는 조용히 속삭인다.


2022년, <오마주>의 지완(이정은 분). 흥행에 실패한 여성 감독. 그녀는 잊힌 여성 감독의 필름을 복원하면서 자기 자신도 천천히 복원해간다. 화려하지 않다. 눈물겹지도 않다. 그냥, 조금씩. 그게 더 오래 남는다.


2023년, <거미집>의 김감독(송강호 분). 이 영화에서 감독은 처음으로 제대로 '미친 사람'이 된다. 검열에 쫓기고, 배우들에게 무시당하고, 제작사에 농락당하면서도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된다"는 집념 하나로 모든 것을 밀어붙인다. 찌질함인지 숭고함인지 헷갈리는 그 경계선 어딘가에, 이 영화가 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스케일은 더 커진다. 1963년 펠리니의 <8과 1/2>은 슬럼프에 빠진 감독 귀도의 내면을 환상과 현실을 뒤섞어 보여준다. 창작의 고통을 미화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안에 함께 들어간다. 1994년 팀 버튼의 <에드 우드>는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불린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끝까지 자기 영화가 걸작이라고 믿었다. 우습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근거 없는 낙관이 부럽다. 그리고 1988년 <시네마 천국>의 살바토레, 2022년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의 새미까지. '성공한 감독'의 서사는 언제나 따뜻하고 찬란하다. 하지만 그 찬란함 뒤에도 반드시 아주 긴, 어둡고 고독한 터널이 있다.


근데 왜 하필 감독인가?


감독은 현장에서는 왕이지만, 일상에선 가장 연약한 존재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감독은 절대 권력에 가깝다. 수백 명의 스태프가 그의 한마디를 기다린다. 카메라의 각도, 배우의 시선, 음악이 들어오는 타이밍 — 모든 것이 그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현장 문을 나서는 순간, 그 권력은 증발한다.


투자사 앞에서는 시나리오 한 줄을 지키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한다. 흥행에 실패하면 다음 작품의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차기작을 기다리는 수년의 시간 동안 그는 수입도, 직함도, 명함도 없는 사람이다. '전직 감독'이라고 소개하기도, 그렇다고 현역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회색 지대에 서게 된다.


이 극명한 온도 차가 인간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그 방어 기제가 타인에게는 잘난 척, 혹은 근거 없는 자존심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것을 찌질하다고 부른다.


영화감독은 '자아'를 가진 예술가이면서도 '인정 욕구'라는 본능을 한 몸에 담고 사는 존재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대중적인 인기도 얻고 싶어한다. 이 딜레마를 잘 넘기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감독이 흥행 감독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예술 한다는 자존심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흔히 고고한 예술을 이야기한다. 인류의 보편적 감정을 담겠다, 시대의 이면을 드러내겠다, 관객에게 전에 없던 경험을 선사하겠다. 이 말들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 지독한 인정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칸에 서고 싶다. 아카데미에 가고 싶다. 평론가들이 내 영화를 두고 논문을 쓰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력적인 누군가에게 '당신의 영화를 보고 삶이 바뀌었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다.


홍상수의 영화가 불편하면서도 통쾌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의 영화 속 감독들은 예술론을 입에 달고 살면서 동시에 가장 사소한 질투와 가장 유치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나도 봐달라'고 외치는 그 이중성.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 그게 우리가 찌질하다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영화를 생산하는 영화감독은 어떤 직업보다 가혹한 '공개 평가'의 세계에 산다. 영화는 개봉 첫 주에 이미 성적표가 나온다. 관객 수, 평점, 좌석 점유율, 전문가 별점. 3년을 바친 작업이 72시간 만에 '실패작'으로 분류된다. "당신이 만든 것은 시간 낭비였습니다"라는 판정을 대중 앞에서, 숫자로, 공개적으로 받는 직업은 많지 않다.


이 구조 안에서 사람은 변한다. 자기 작품을 과도하게 설명하거나, 실패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거나, 다음 작품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과장되게 피력하거나. 그 모든 행동이 사실은 공포에서 비롯된 방어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그냥 찌질해 보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영화감독이 될 확률이 너무 낮다'는데 있다. 학교에서 실습처럼 만드는 영화를 제외하고, 소위 외부의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는 상업 영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영화감독이란 직함을 갖고 유지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니 영화감독이 '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에 가깝다. 한국에서 매년 영화학과를 졸업하는 학생은 수천 명이다. 그중 단편을 완성하는 사람은 절반이 안 되고, 장편 데뷔를 하는 사람은 그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데뷔를 했다 해도, 두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또 그중 일부다. 세 번째, 네 번째로 가면 숫자는 더 줄어든다. 어느 기준으로 보더라도, 영화감독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찌질함을 만드는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확률이 낮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찌질하다. 10년을 기다려도 기회가 오지 않는데 "나는 아직 때가 안 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주변에서 한 명씩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해 나가는 동안, 혼자 남아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치는 사람들. 그 집착이 외부에서는 현실 감각 없음으로 보인다. 어른스럽지 못함으로 보인다. 찌질함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확률이 낮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그 사람이 결국 성공했을 때는 '집념'이라고 부르고, 실패했을 때는 '찌질함'이라고 부른다. 결국 찌질함과 집념은 같다. 다만 결과가 판정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감독은, 확률적으로, 집념 쪽보다 찌질함 쪽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영화감독의 찌질함은 어떤 의미에서 예고된 것이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이다. 수천 명이 입구에 줄을 서는데 문은 몇 개 열리지 않는 구조, 그 구조가 필연적으로 '안으로 못 들어간 사람들의 긴 행렬'을 만들어낸다. 그 행렬 속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을 찍은 영화가, 바로 우리가 '찌질한 감독 영화'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들이 찌질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걸 찌질하다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비틀어야 한다.


'왜 영화감독은 찌질한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영화감독의 그 모습을 찌질하다고 느끼는가'.


생각해보면 그들이 하는 행동들 — 이상을 포기 못 하는 것,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실패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 자기 합리화를 멈추지 못하는 것 — 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하는 것들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훨씬 조용히, 훨씬 덜 드러나는 방식으로 할 뿐이다. 직장 회의실에서, 집 안 소파에서, 혼자 걷는 퇴근길에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그 내면의 소용돌이를 가장 선명하게 가시화하는 직업이다. 이상이 클수록 현실의 초라함은 더 도드라진다. 꿈이 구체적일수록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낙차는 더 크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선언하는 행위다. 그 선언의 무게가 현실에 짓눌릴 때, 인간은 찌질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영화 속 찌질한 감독들을 보며 킥킥대는 웃음 속에는, 사실 아주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다. 안도감("저 사람도 저러네"), 공감("나도 저럴 때 있는데"),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경외("그래도 저 사람은 선언했잖아").


최근 화제가 된 소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황동만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울면서 말한다.


"내가 이 바닥 20년이야. 그런데 아는 연예인 하나도 없다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


서늘하다. 그러나 우린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차마 내 속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순간들을 말이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그 감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도록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찌질한 줄 안다. 아마 누구보다 잘 안다. 영화감독이 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그래서 일종의 고백이다. '나도 내가 이런 거 알아. 근데 이 판이, 이 꿈이, 이 일이 그래.' 동시에 그 고백 속에는 변명 아닌 변명이 있다. 이상이 클수록 현실은 더 잔인하다는, 그 오래된 진실에 대한.


이상이 비대해질수록 현실은 더 비루해 보인다.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해 쩔쩔매는 감독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표정일지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영화에서 거장이 되고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제작비에 쪼들리고, 평가에 흔들리고, 다음 장면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 찌질한 감독에 가깝다.


그러니 스크린 속 그 감독들을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비겁함과 소심함에 보내는, 가장 너그럽고 가장 솔직한 웃음이기도 하니까.




2화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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