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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신 Oct 23. 2024

TV 시대 속 워너 브라더스: 길을 잃은 거인

극장 분리에서부터 매각까지 (~1967) (4)

파라마운트 판결로 인해 제작-배급-상영(극장)의 밸류체인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영화 사업자들이 극장을 인위적으로 털어내야 했다. 이제 영화사업자들은 상대적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한 채 제작-배급이란 리스크를 안고 사업을 해야 했다. 흥행사업의 속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한탕주의적 성격이 강한 투기적 성격이 강한 사업 영역에 노출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로 넘어가면서 워너는 스스로 강점이 있었던 애니메이션과 서부극 등 특정 장르에 집중하면서 수익을 창출하긴 했지만, 극장 소유권을 상실한 후에는 영화 배급 만으로는 재정적 안정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폭풍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바로 TV 시장의 등장이다. 오늘날 넷플릭스의 열풍만큼이나 TV의 등장은 조용하지만 과격했고 파괴적이었다.


1927년 필로 판스워스(Philo Farnsworth)가 전자 텔레비전의 첫 실험적 전송이 성공한 이후에 약 10년 뒤인 RCA가 1939년 뉴욕세계박람회에서 TV를 에서 루스벨트의 연설을 생중계하면서 TV 방송의 시작을 알렸다.  (RCA가 NBC를 설립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주춤하다가 본격적인 상업방송은 소위 정규 편성이란 개념이 등장한 1948년부터  시작한다. 1947년에는 몇 천대에 불과했던 보급율이 1950년에는 미국 가정의 9%로 올라갔고, 1955년에는 50%까지 올라갔다. 이때부터 TV는 주류 매체가 되었다. (1965년 미국 가정의 90%가 TV를 보유했다)


10대 Show in 1950s


영화산업이 구조적 변화를 겪는 와중에 숨어있던 TV가 급작스럽게 영화산업을 강타한 셈이다. TV는 결코 동반자가 아니었다. TV의 보급율이 늘어나는 만큼 영화 관람객 수는  감소했다. 1946년 45억 명에 달했던 극장 관람객수는 1950년에는 42억 명으로, 1955년에는 25억 명 순으로 떨어졌다. 1965년에는 10억 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앞 뒤가 다 문제였다.  영화 제작과 영화 배급을 가진 사업자의 입장에서 부상하고 있는 TV 시장의 진입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업자가 TV 시장에 진출했다.


워너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워너 3형제 중 해리(Harry Warner)와 잭(Jack Warner)은 TV 시장 진입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해리는 극장 소유권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조금 더 보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잭은 과감하게 TV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5년 워너가 처음으로 TV 시리즈를 제작한 것은 잭의 영향 때문이었다. Cheyenne(1955~1962),  Maverick(1957~1961), 77 Sunset Strip (1958~1964)과 같은 작품은 대중적인 흥행을 이끌어내기도 했었다.

WarnerBros. 초기 방송 작품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워너의 TV 시장진출은 준비되지 않은 진출이었고,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Conflict (1956~1957)는 한 시즌만에 종영되었고, The Roaring 20's (1960~1962) 역시 조기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잭은 영화사들이 TV 산업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일종의 수업료로 판단한 것이다. 해리는 종종 잭의 모험적인 프로젝트에 반대했고, 잭은 본인이 형제들에게 억눌리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잭은 딴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잭이 워너의 대표가 되다


이 즈음 해리 중심의 워너가 잭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지분 재매수 사건이다. 1956년 워너 3형제는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전체 지분을 매각하기로 서로 합의를 했다. 공들여 키운 회사지만 이제는 새로운 투자자들에게 매각하고 은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캐나다 투자 그룹인 엡 로즈 투자은행(Loeb, Rhoades & Co.)을 통해 지분을 매각하려고 했고, 이 회사의 세르지 세메넨코 (Serge Semenenko)가 주도했다. 매각 금액은 3천만 달러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억 달러 규모다. 1955년 RKO의 매각 대금이 1250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워너의 매각 대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세르지 세메넨코(1903~1980)


그런데 잭은 형제들과의 합의를 깨고 비밀리에 계획을 세워, 세르지 세메넨코와 협의하여 자신의 지분을 다시 매입했다. 형제들은 지분 매각을 하고 회사와의 관계를 정리한 순간 잭 스스로는 다시 지분을 매입해서 경영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3형제 체제의 워너가 잭 1인 체제의 워너로 바뀌는 상황이다. 이 일로 해리와 잭은 평생 결별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사들은 TV를 구매처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방영권 판매 시장이 열린 것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정이었다.  방영할 수 있는 콘텐츠는 부족한 반면 시간은 채워야 했다. 자체 제작 만으로는 주어진 시간을 채우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구작 구매는 방송사 입장에서도 괜찮은 거래였다. 더구나 TV에서 극장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사람들을 TV 수상기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무기였기에 방영권은 제법 괜찮은 가격에 거래가 되었다.


작게는 영화 제작비의 5%에서 많게는 30%에 이를 정도로 방영권료가 나왔다. 영화사로서는 괜찮은 수익 모델이 생긴 셈이다. 예를 들어 400만 달러가 들어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방영권은 100만 달러에 달했고, 제작비 67만 달러의 <킹콩>(1933)은 19만 5천 달러에  방영권이 팔렸다. <오즈의 마법사>(1939)는 총 제작비 280억 달러였는데, 방영권은 22만 5천 달러였다. 워너 역시 방영권 수익으로 제법 솔찬한 수익을 확보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다른 영화사보다는 좋지 못했다. 파라마운트와 MGM 등은 1950년대까지 매해 60여 편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한 반면에 워너는 1950년대 약 40여 편에서 1950년대에서는 2~30여 편으로 줄었다. 따라서 방영권으로 판매할 수 있는 영화의 숫자가 작았다. 더구나 파라마운트 등은 패키지 판매 등을 통해서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방영권 수익을 올렸던 반면에 워너는 단품 판매에 의존했었다. 결과적으로 방영권이란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시대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참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 공격적인 영화 제작으로 위기를 극복한 잭은 여전히 대형 작품, 그리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뮤지컬 등으로 이 시기를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바로 베이비붐 세대의 출현이다. 현재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세대다.

https://www.mad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7925

이들은 오늘날 표현대로 라면 TV Native 세대다.  자연스럽게 TV는 문화 소비의 주류가 되었다.  이 세대는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했다. 더 현실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원했다. 베트남 전쟁, 시민권 운동, 여성 해방 운동이 온 사방에서 들고일어났던 시기였다. 1950년대식의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영화는 그들의 취향이 아니었다.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1931~2014) 감독의 졸업 (The Graudate)과 데니스 퍼(Dennis Hopper, 1936~2010) 감독의 이지라이더(Easy Rider)가 이 세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기성과는 다른 독립적인 제작방식과 저예산영화였지만, 새롭고 실험적이었다.


대형 영화사들은 이런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무시했다.  대작 영화와 뮤지컬 같은 장르에 높은 제작비를 들였다. MGM의 <닥터 지바고>(1965)와 <사운드 오브 뮤직>(1965)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젊은 세대는 흥미를 잃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스타이즈본>(A Star is Born, 1954)는 성공했지만, 폴뉴먼의 데뷰작이기도 한 기독교 영화 <은술잔>(the Silver Chalice, 1954) 제작비를 건지지 못했다. 연이어 제작한 <파라오의 땅>(Land of the Pharaohs, 1955)도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워너 형제들이 워너를 매각해야겠다고 생각한 이면에도 이런 흥행 실패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제국의  몰락>(The Fall of the Roman Empire, 1964)는 18.4백만 달러의 에산을 투입해 만들었으나, 돌아온 건 4.8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뮤지컬로 제작한 카멜롯(Camelot, 1967) 역시 참패했다. 과거, 환상과 로맨스는 이들 세대의 언어가 아니었다. 워너 브라더스는 기존의 제작 방식을 고수했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변화된 취향과 요구에 맞춘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다.


뉴 할리우드가 시작되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끄는 세상이었다.  이들은 대형스튜디오에 의존하지 않았다.


원래 영화는 흥행과 실패를 반복한다. 아무리 뛰어난 영화사도 항상 흥행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손실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더욱더 규모를 키워서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만회하고 싶었지만, 시장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워너는 1967년 영화와 TV 제작 시장에서 의미있는 성장을 하고 있는 세븐 아츠(Seven Arts)와 합병을 단행했다. 1960년대 후반은 TV 콘텐츠 수요가 증가하던 시기였던 만큼, Seven Arts의 경험이 워너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Seven Arts와의 합병 이후 합병법인은 DC 코믹스를 인수했다. 지금으로 치면 원천 IP를 인수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재정적 위기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결국 결국 잭은 1969년 워더 브라더스를 6,400만 달러에 Kinney National Company에 매각했다. Kinney National Company는 원래 주차장 및 청소사업을 하던 회사였다. 1960년 초반부터 출판, 건설, 자동차 서비스 등의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이런 기업이 1969년 워너 브라더스를 인수해 미디어 산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제 브라더스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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