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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라

이 엄중한 시절에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나?

2025년 방송학회 <대전환 시대, 방송미디어의 공공성과 산업의 지속 가능성 확보>란 대주제 세션에서 발표한 자료다. 힘들고 어렵지만 산업은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정부는 한류의 과실만을 자랑할 뿐 여전히 그들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은 없어 쓴 글이다. 정부가 이제는 나서줘야 할 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국가전략첨단산업을 이야기한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1. K-콘텐츠의 역설과 전략적 결단의 필요성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인 K-콘텐츠의 신드롬, 그 눈부신 성공의 한가운데 서 있다. 2023년 기준 약 133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수출액을 기록한 K-콘텐츠는, 이제 가전제품(약 80억 달러)이나 이차전지 소재 일부 품목(약 100억 달러 내외)을 넘어서는 당당한 수출 효자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 시청 시간을 기록하고, BTS가 UN 총회장에서 전 세계 청년들을 대변하며, <기생충>이 아카데미 92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Kpop Demon Hunters(K팝 데몬 헌터스)>가 K-POP 그룹이 악마를 사냥한다는 독창적인 세계관으로 시장을 압도한 이 경이로운 현상은 단순한 문화적 유행을 넘어섰다. K-콘텐츠는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에 가장 매력적이고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소프트 파워’의 핵심 아이콘이자, 국가 경제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그 가능성을 명백히 입증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우리는 성공의 크기만큼이나 심각한 ‘K-콘텐츠 산업의 붕괴’란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전 세계가 K-콘텐츠에 열광하는 동안, 정작 국내 미디어 산업 생태계의 허리는 부러지고 있다. 넷플릭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우리의 선택권이 박탈당하고 있다. 넷플릭스 이외엔 제대로 손익을 맞출 수 없기에 울며겨자 먹기로 매절 계약을 해야 한다. 시장 내 선택 옵션이 없다는 이른바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선택지가 되어야 할 국내 사업자는 현재의 상황만을 보고 자기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고 있고, 국가 산업이란 큰 틀 속에서 조정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나 규제기관은 화려한 성과만을 취할 뿐이다. 그 사이에 티빙(Tving), 웨이브(Wavve) 등 국내 토종 OTT 플랫폼들은 합산 수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를 감내하며, 이제는 생존을 위한 사투를 넘어 누적 적자 1조 원 돌파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와챠가 기업 회생 절차를 밟는 등 국내 OTT 절멸의 초침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넷플릭스의 문전을 넘나드는 제작사는 IP에 함구하고 넷플릭스 문턱을 못 넘은 이들은 종속이라면 목소리를 높이는 기이함이 넘친다. 불꽃야구에 환호하면서도 기업과 기업의 계약을 경시하는 이 흉측한 상황에도 다들 관망하고 있다. 구조와 계약이 아니라 관계와 이해를 중시하는 이 상황은 넷플릭스 1사 체체라는 전례 없는 클라이박스롤 향해 한발 한발 가는 중이다.


문화강국 300조를 내세웠지만 정부는 K-콘텐츠의 급격한 성공 속도에 따른 정책적 대응도 못하고 있고, 산업 보호를 못하고 있는 데도 이 구조적 실패를 조정하려는 어떤 신호도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도 민간은 살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티빙은 좀 더 나은 판매 조건과 혹시라도 모를 북미 진출을 위해 HBO와 손을 잡았고, 스튜디오 드래곤은 일본 방송사와 제작사와 같이 크로스 콘텐츠를 만드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일본 사업자와 손을 잡고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정부가 답할 차례다.


이 글은 위기감 속에서, 우리는 한 국가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산업’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한 국가의 미래는 그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변곡점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적 결단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왔다.


1970년대의 척박한 땅에서 중화학공업을 일으켰고, 1980년대 모두가 불가능이라 말하던 반도체에 과감히 투자했던 것이 그러했다. 1970년대의 ‘기술 안보’가 포탄을 만들 강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면, 1980년대의 ‘기술 안보’는 전자제품의 두뇌가 될 반도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처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핵심 산업 영역을 설정해 왔다.


제2장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1970년대 '국가 기간산업'으로 불렸던 중화학공업에서부터 1980년대의 반도체, 1990년대의 정보통신(IT) 산업, 그리고 2020년대 '기술 안보'를 중심으로 법제화된 '국가 첨단 전략 산업'에 이르기까지, 이 '전략산업'의 목록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그리고 지금 2025년, 이 역사적인 목록에 '콘텐츠 산업'을 포함시켜야 할 또 한 번의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21세기의 ‘기술 안보’는 바로 ‘문화 안보’이자 ‘IP 안보’이기 때문이다.


K-콘텐츠의 성공이 일회성 행운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국가의 핵심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콘텐츠를 ‘문화’나 ‘여가’의 영역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20세기가 석유와 철강, 즉 유형의 하드웨어를 선점하는 경쟁이었다면, 21세기는 무형의 IP와 플랫폼, 그리고 인간의 창의성을 선점하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K-콘텐츠가 마주한 '성공의 역설'과 '주권의 위기'를 방치한다면 그 미래는 없다.


콘텐츠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넷플릭스 1사 체제를 막고, 넷플릭스 외 대안 구조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Q와 P를 모두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다른 의미의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 바로 콘텐츠 산업의 국가 전략 산업화다.


1980년대, 우리가 만약 반도체 기술을 단지 ‘라디오 부품’ 정도로 폄하했다면 오늘날의 삼성전자는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20년대에 K-콘텐츠를 단지 ‘TV 드라마’ 정도로 폄하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가장 강력한 성장 엔진을 스스로 포기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천착하여, 왜 지금 이 시점 '콘텐츠 산업'이 과거의 반도체와 현재의 이차전지가 그러했듯, 국가의 명운을 걸고 육성해야 할 '전략산업'으로 지정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당위성과 시급성을 중심으로 역설하고자 한다.


2. 국가 전략 산업의 진화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특정 산업을 선정하고, 가용한 자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투자하는 ‘전략산업 정책’의 개념은 1970년대부터 일관되게 존재해 왔다. 물론 ‘국가 첨단 전략 산업’이라는 현재의 법률 용어는 2022년에 이르러서야 등장했지만, 그 명칭이 ‘국가 기간산업’이든, ‘신성장동력’이든, 그 시대의 가장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산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한다는 정책적 DNA는 지난 50여 년간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이 전략 산업의 대상 산업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시대가 제기하는 과제,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 그리고 글로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진화해 온 ‘시대정신의 거울’이었다. 따라서 이 궤적을 되짚어보는 것은, 지금 이 시점 왜 ‘콘텐츠 산업’이 그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


1970년대: ‘생존’과 ‘기반 구축’의 시대

국가 기간산업 1970년대는 말 그대로 ‘생존’이 시대적 과제였다. 1970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고작 250달러 내외였다. 전쟁의 폐허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의 주력 수출품은 가발, 합판, 섬유 등 경공업 제품으로, 부가가치가 낮아 국가 경제를 견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973년 ‘중화학공업(HCI) 육성 계획’을 선언한다. 이는 단순히 경제 성장을 넘어,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독자적인 방위 산업 기반을 갖추려는 ‘자주국방’의 절박함과 맞물려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과 ‘수출 100억 달러’라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중화학 공업은 국가의 근간 그 이상이었다.

이때의 용어는 ‘전략산업’이기보다 ‘국가 기간산업(Key Industries)’에 가까웠다. 문자 그대로 산업의 ‘기간(基幹)’, 즉 모든 산업의 뿌리이자 토대가 되는 산업을 의미했다. 철강(포항제철), 조선(현대조선), 석유화학(울산석유화학단지), 기계(창원기계공업단지), 전자, 비철금속 등 6대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1973년 포항제철 1기 완공은 이 거대한 여정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기 전략산업의 의미는 명확했다.


이는 경제 논리를 넘어선 ‘국가 건설’의 영역이었다. 철강 없이는 배를 만들 수 없고, 배 없이는 수출할 수 없으며, 석유화학 없이는 섬유 공장을 돌릴 수 없었다. 또한 총과 포를 만들기 위한 강철이 필요했다. 정부가 모든 정책금융과 세제 혜택을 ‘선택과 집중’의 원칙 하에 이들 산업에 쏟아부은 것은, 국가의 생존을 건 거대한 토목공사이자,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


1980년대: ‘도약’과 ‘기술 집약’의 시대

전략산업이란 용어가 등장한 시기다. 1980년대는 70년대의 성공적인 기반 구축 위에서, 질적인 ‘도약’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다. 70년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눈부신 성장을 가져왔지만, 1,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원자재 가격 변동에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이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또한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엔화 가치가 급등하며 발생한 반사 이익과 무역 압박이 강해졌다. 국내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규모’에만 의존하는 ‘노동 집약적’ 산업 구조로는 더 이상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시대는 ‘규모’에서 ‘기술’로, ‘노동 집약’에서 ‘자본·기술 집약’으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바로 이 시기에 ‘국가 기간산업’을 넘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미래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의미의 ‘전략산업’이라는 용어가 정책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두 산업은 자동차와 반도체였다. 1986년 현대자동차의 ‘엑셀(Excel)’이 미국 시장에 수출된 것은 단순한 제품 판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술력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조립 상품이 세계 시장에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더욱 극적인 것은 반도체였다. 1983년 삼성의 ‘도쿄 선언’과 64K D램 개발은, 당시로서는 막대한 자본과 불확실한 기술력 사이에서 국가의 명운을 건 거대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민간은 ‘기술보국(技術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이 도박에 동참했다. 이는 일본이 독점하던 시장에 뛰어들어 원자재 가공국에서 첨단 기술 부품 생산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80년대 전략산업의 의미는 ‘기반’을 넘어선 ‘도약’ 그 자체였으며, 글로벌 공급망의 일원으로 편입되기 위한 기술 주권 확보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 2000년대: ‘혁신’과 ‘신성장’의 시대

정보통신(IT)과 CT의 시대다. 199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정보화 혁명’과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충격이 전략산업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바꾼 시기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와 김대중 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Cyber Korea 21)’ 정책은 ‘굴뚝 산업’이 아닌 ‘디지털 산업’을 국가의 미래로 명확히 지목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기존 대기업 중심의 중후 장대 산업 구조의 실패를 의미했다, 부채에 의존해서 외형을 키우며 성장하는 우리의 핵심 전략이 외부 충격에 이렇게 손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시스템 자체가 허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국가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규제를 혁파하고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정보통신(IT) 산업을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다. 이는 1970년대의 ‘경부고속도로’가 1990년대에는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대체된 것과 같았다. 정부가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전국에 ‘디지털 하이웨이’를 깔아준 결과, 이는 소프트웨어, 인터넷 인프라, 그리고 초기 디지털 콘텐츠(게임)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1998년 NC소프트의 <리니지> 출시, 넥슨의 성장, 네이버(당시 NHN)의 등장은 이러한 정책적 배경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시기 전략산업은 ‘제조’가 아닌 ‘혁신’과 ‘속도’를 의미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기조가 ‘신성장동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다각화되었다. 참여정부의 ‘10대 차세대 성장동력’과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 정책 등은 바이오(BT), 나노(NT), 디스플레이(OLED) 등을 미래 산업으로 포함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문화 기술(CT, Culture Technology)’이 신성장동력의 한 축으로 공식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비록 제조업 중심의 다른 산업들에 비해 우선순위나 투자 규모 면에서 밀렸으나, ‘문화’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산업적 가치’를 지닌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국가 정책의 영역으로 공식 진입한 것이다.


2010년대 ~ 현재: ‘안보’와 ‘법제화’의 시대

국가 첨단 전략 산업 이전까지 ‘전략산업’이 주로 정부의 ‘육성 계획’이나 ‘신성장동력’ 선언 등 정책적·행정적 차원에 머물렀다면, 최근 10여 년간 이 개념은 질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맞이했다. 4차 산업혁명,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격화,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우 전쟁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의 급격한 붕괴는, 특정 기술이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좌우하는 ‘기술 안보 자산’으로 부상했음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칩(MCU) 하나가 부족해 국내 현대·기아차의 생산 라인이 멈춰 서는 초유의 사태는, 1970년대 오일쇼크와 맞먹는 충격적인 교훈을 남겼다. 이 트라우마는 ‘공급망 안정화’가 곧 ‘국가 안보’ 임을 재확인시켰다.


이 ‘안보’라는 새로운 시대적 시급성 때문에, 국가는 과거의 분산된 정책들을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단일 체계로 묶을 필요가 생겼다. 2022년 시행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다. 이 법은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특정 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핵심 논리는 동일하게 계승하지만, 그 동인이 ‘수출 증대’에서 ‘기술 안보’와 ‘공급망 재편’이라는 방어적·전략적 성격으로 명확히 이동했다.


또한 ‘정책 선언’ 수준을 넘어, 규제완화와 세제혜택과 같은 공식적인 지원과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보호 조치를 ‘법제화’하여 강력한 실행력을 담보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법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 등을 ‘국가 첨단 전략 기술’로 공식 지정하고, 이들을 육성하기 위한 특화단지 지정, 규제 완화, 세제 지원 등을 명문화했다. 최근에는 로봇, 방산 등도 이 범주에 추가되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전략산업 리스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기반 구축(70s) → 기술 집약(80s) → 정보화(90s) → 미래 다각화(00s) → 기술 안보 법제화(20s)’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이는 곧, 지금의 법적 정의 역시 영원하지 않으며, ‘문화 안보’와 ‘IP 안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대두된 지금, 언제든 다시 진화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3. K-콘텐츠, 전략산업 지정의 비교 우위와 최우선 당위성

K-콘텐츠는 국가 전략 산업으로 손색이 없는 걸까? 이 바닥에 있는 우리야 K-콘텐츠의 힘과 기여를 주장하지만,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위해서 국가 전략 산업화를 내세우는 것이 비단 우리뿐만은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과연 국가 전략 산업으로 콘텐츠 산업이 적합한 것인지를 묻는 것은 그래서 필요한 작업이다.


‘국가전략산업’의 대상 산업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항상 진화해 왔다. 2022년 법제화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은 이러한 진화의 최신 결과물로, ‘기술 안보’를 핵심 가치로 내 걸었다. 따라서 K-콘텐츠를 이 법적 범주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중요한 산업’이라는 선언을 넘어, 현재 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 하에서 기존 지정 산업 및 여타 후보 산업들과의 ‘비교 우위(Comparative Advantage)’를 명확히 입증해야 한다.


현재 <국가첨단전략산업법>에 따라 지정된 핵심 산업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다. 이들 ‘기존 전략산업(Incumbents)’은 명확한 공통점을 갖는다. 조(兆) 단위의 천문학적인 설비투자(CAPEX)를 요구하는 ‘하드웨어 기반의 장치 산업’이다. 나노미터(nm) 단위의 공정이나 에너지 밀도(Wh/kg) 등 물리학과 화학에 기반한 ‘공학적 기술 난이도’가 핵심이고, 공급망이 마비되면 국가 기간산업이 멈춰 서는 ‘전통적 기술 안보’와 직결되는 산업 영역이다.


K-콘텐츠는 이러한 전통적 잣대로는 이질적으로 보인다. 핵심 자산은 공장이 아닌 ‘IP(지식재산권)’이며, 기술 난이도는 공학이 아닌 ‘창의력(문화 기술)’에 기반하고, 안보 위협은 물리적이 아닌 ‘주권적(플랫폼 종속)’ 형태를 띤다. 그러나 바로 이 ‘다름’이 21세기 무형자산 시대에 K-콘텐츠가 갖는 압도적인 ‘비교 우위’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략산업을 지정하는 첫 번째 법적 요건은 '국가·경제 안보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현재 지정된 반도체와 배터리의 안보 논리는 명확히 ‘공급망 안보(Supply Chain Security)’에 기반한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대란이나 핵심 광물(리튬, 코발트)의 무기화에서 보듯, 이들의 부재는 즉각적인 ‘생산 마비’라는 물리적 위협을 초래하며 이는 ‘기술 안보’의 핵심이다. 그러나 K-콘텐츠가 제시하는 안보 논리는 이와 결이 다른 듯 보이지만, ‘주권 안보(Sovereignty Security)’란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동일하다.


넷플릭스 1사 체제에 의한 플랫폼 종속은 자동차 공장이 멈추는 것과 같이 즉각적인 고통을 주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문화적 종속’과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제 발로 찾아간 <오징어 게임>으로 넷플릭스에 1조 원의 가치를 안겨줄 때, IP를 상실한 황동혁 감독은 그 과실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고 투덜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엄연히 황감독의 <오징어 게임>을 수용하지 못한 국내 영상산업의 선택이고, 이를 수용한 넷플릭스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때 선택이란 용어를 쓰는 건 황감독에게도 우리에게도 넷플릭스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넷플릭스 1사 체제가 된다면 이때는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사실상 매절 계약 ‘만’을 원하는 넷플릭스이기에 넷플릭스 1사 체제는 매절 계약이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기본이자 표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반도체 핵심 기술을 해외에 무상으로 넘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IP 안보’이자 ‘경제 안보’의 위협이다. 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유튜브 등 해외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국내 여론과 문화적 취향이 종속되는 ‘알고리즘 안보’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이는 공장 라인이 멈추는 것보다 더 교묘하고 심층적인 주권 상실이다. 반도체가 ‘기술 안보’라는 현재의 방패라면, 콘텐츠는 ‘문화·IP 안보’라는 미래의 영토다. 21세기는 물리적 생산 라인뿐만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과 무형자산(IP)을 지배하는 국가가 패권을 쥐며, K-콘텐츠가 마주한 ‘주권의 위기’는 ‘공급망의 위기’와 동등하거나, 미래적 관점에서는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니는 국가 안보 의제다.

두 번째 핵심 요건은 '연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기존 산업의 파급효과는 강력할 뿐만 아니라 그 성격이 ‘수직적(Vertical)’이다. 반도체는 가전, PC, 서버와 같은 전방 산업과 소재, 부품, 장비 등 후방산업을 견인하면서 전체 산업 생태계 내부를 고도화한다. 최근에는 AI의 중요성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산업을 위한 기간산업적 성격도 띠게 되었다.


이에 비하면 K-콘텐츠의 파급효과는 ‘수평적(Horizontal)’이다. 또한 ‘전방위적(Omni-directional)’이기도 하다. K-콘텐츠는 반도체처럼 다른 산업의 ‘부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종 산업의 ‘최전선 마케터’이자 ‘총괄 지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케데헌’이 보여준 힘과, 삼양라면으로 대표되는 K-푸드와 달바와 같은 뷰티 산업이 K-콘텐츠, 특히 K-영상물에 의해서 성장한 것을 지켜보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K-콘텐츠 수출이 1억 달러 증가할 때, 화장품(1.87억 달러), 식품(0.74억 달러) 등 소비재 수출이 총 2.5억 달러 동반 상승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콘텐츠가 그 자체의 수출액(2023년 133억 달러)을 훨씬 뛰어넘는 ‘수출 견인 레버리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생충>이 농심 ‘짜파구리’의 전 세계적 유행을 만들어 2023년 라면 수출 9.5억 달러 돌파의 기폭제가 되었고, BTS는 한국어 학습 열풍을 일으켜 전 세계 세종학당 수를 10년 만에 3배(2013년 90개소 → 2023년 248개소)로 늘렸다.


이러한 파급효과는 심지어 전통적인 전략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K-드라마에 등장한 삼성전자의 최신 폴더블폰과 LG전자의 OLED TV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글로벌 쇼케이스가 되어 기술 리더십을 강화한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라면, 콘텐츠는 ‘수출의 관문’이다. 반도체가 없으면 제품을 못 만들지만, 콘텐츠가 없으면 아예 팔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K-콘텐츠가 창출하는 ‘소프트 파워’는 K-뷰티, K-푸드, K-관광 등 모든 소비재 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그 어떤 산업도 대체 불가능한 비교 우위를 지닌다.


세 번째 요건은 '높은 성장 잠재력과 기술 난이도'다. 기존 산업들은 이미 시장 점유율이 높은 성숙 시장에서의 ‘수성(守城)’의 측면이 강하다. 수십 조의 설비투자와 직결되는 ‘자본·공학적 난이도’에 의존하는 편이다.


반면에 K-콘텐츠의 잠재력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 있다. 전 세계 콘텐츠 시장 규모는 약 2.5조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약 1,300억 달러)의 20배에 달하는 거대 시장이며, K-콘텐츠의 현재 점유율은 3% 미만으로 무궁무진한 ‘성장의 여지(Upside Potential)’가 남아 있다. 또한 K-콘텐츠의 기술은 공장이 아닌 ‘창의적 인적 자본’에서 나온다. K-POP의 다년간 트레이닝 시스템, <무빙>이나 <마스크걸>처럼 웹툰 IP를 즉각 영상화하는 스튜디오 시스템, 드라마의 신속한 제작 파이프라인, 그리고 VFX·CG 기술력(예: 덱스터스튜디오)은 타국이 막대한 자본으로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창의적 해자(Creative Moat)’다.


이는 수십 조를 들여 반도체 팹을 짓는 것(공학적 난이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오히려 복제가 더 어려운 ‘문화 기술(CT)’이다. 무엇보다 ‘투자 효율성(ROI)’ 개념을 적용하게 되면 그 어떤 전략산업보다 압도적 비교 우위를 가진다. 수십 조의 설비 투자 없이도 <오징어 게임>(제작비 약 280억 원) 같은 작품 하나로 1조 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저성장 시대에 대한민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고효율·고부가가치’ 산업의 전형이다.


마지막 네 번째 요건은 '국민 경제 기여도', 즉 수출과 고용이다. 물론 반도체는 2023년 약 986억 달러를 수출한 대한민국 1위 산업으로, 그 절대적 기여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K-콘텐츠의 수출 규모는 2023년 133억 달러로, 얼핏 보면 반도체에 비해 작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가전(약 80억 달러)을 이미 넘어섰으며, 이차전지 소재(약 100억 달러 내외)와 대등하고, K-POP, 웹툰 등 집계되지 않은 디지털 수출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훨씬 크다. 물론 K-콘텐츠 중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영상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것은 숙제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K-콘텐츠가 지난 7년간 연평균 10% 이상 성장해 왔다는 대목을 우리는 예의 주시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의 성장률을 보이는 산업 영역은 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K-콘테츠 산업은 2023년 기준 약 6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약 30만 명)의 2배에 달하는 규모다. 제조업 고용이 자동화와 해외 이전으로 인해 위협받는 반면, 콘텐츠 고용은 AI로도 대체 불가능한 ‘창의적 일자리’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우수하며, 평택이나 이천 등 특정 지역에 고도로 집중되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달리, 콘텐츠 산업(작가, 디자이너, 개발자, 마케터 등)은 서울 전역과 판교 등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더 넓은 ‘창의적 중산층’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대부분의 산업이 역성장할 때 유일하게 성장을 지속하며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것 또한 콘텐츠 산업이었다. 따라서 K-콘텐츠는 절대적인 수출액에서는 반도체를 따라가기 어렵지만, ‘고용 창출 효과’와 ‘지속 가능한 성장성’, ‘경제적 회복 탄력성’ 측면에서는 이미 반도체를 능가하는 국민 경제 기여도를 보이고 있다.

K-콘텐츠는 최근 전략산업화를 강력히 주장하는 로봇, 방산, AI 등 다른 미래 산업 후보군과 비교할 때도 ‘최우선적(Top Priority)’으로 지정되어야 할 명백한 이유를 지닌다. AI나 로봇이 미래 산업의 ‘기반 기술(Enabling Technology)’이라면, K-콘텐츠는 이 기술들에게 가장 강력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자 최대 수요처다. 콘텐츠라는 ‘수요’가 없으면 AI와 로봇이라는 ‘공급’은 공회전할 위험이 크기에, 수요처인 K-콘텐츠를 먼저 전략 산업화하는 것이 순서다.

최근 폴란드 수출 등으로 각광받는 방산(K-Defense)이 본질적으로 ‘B2B(혹은 B2G)’ 산업이라 그 파급력이 제한적인 반면, K-콘텐츠는 압도적인 ‘B2C 산업’으로서 K-POP 팬덤이 즉시 K-뷰티의 소비자가 되게 만든다. 방산이 ‘K-9 자주포’라는 제품을 파는 산업이라면, 콘텐츠는 ‘대한민국이라는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파는 산업이다.


결론적으로 K-콘텐츠의 최종적인 비교 우위는 그 어떤 산업도 대체 불가능한 ‘소프트 파워’에 있다. K-콘텐츠가 창출한 ‘Brand Korea’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심지어 방산(K-Defense)과 AI(K-AI)의 수출에도 ‘후광 효과(Halo Effect)’를 미친다. ‘K-’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신뢰도가 상승하는 현상은 K-콘텐츠가 지난 20년간 쌓아 올린 무형의 자산이다. K-콘텐츠는 단순히 여러 후보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산업(방산, 로봇, AI, 뷰티, 식품)의 성공 확률을 높여주는 ‘마스터 키(Master Key)’ 역할을 한다. 이 마스터 키 산업을 최우선으로 육성하고 보호하는 것이 대한민국 경제 전반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


4. 콘텐츠 산업의 국가 전략 산업화를 許하라

역사가 증명하듯, 대한민국의 전략산업 목록은 고정된 박제물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진화하는 유기체였다. 1970년대 ‘국가 기간산업’의 논리로 2020년대의 콘텐츠 산업을 재단할 수 없으며, 2020년대 ‘기술 안보’의 논리로 콘텐츠 산업의 ‘문화 안보’적 가치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20세기의 산업 논리에 머물러 콘텐츠 산업을 단순한 문화의 영역으로 방치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스스로 녹슬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1980년대에 ‘반도체’를 라디오 부품 정도로 폄하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20년대에 ‘콘텐츠’를 단순한 드라마나 오락거리로 폄하한다면, 미래의 대한민국 또한 위태로울 것이다.

K-콘텐츠 산업은 ‘문화 안보’라는 시급성, ‘전 산업 견인’이라는 파급력, ‘창의적 기술’이라는 난이도, 그리고 ‘고부가가치 수출’이라는 기여도 측면에서 현행법상 국가전략산업의 지정 요건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충족한다.

나아가, 이미 지정된 반도체·배터리 산업과 비교해도 21세기 무형자산 시대의 논리로 볼 때 압도적인 비교 우위를 점하며, 로봇·방산 등 여타 후보 산업보다 먼저 육성되어야 할 ‘최우선 순위(Top Priority)’를 지닌다.

이런 가치를 지닌 K-콘텐츠는 지금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해져 있다. 제작편수는 감소하고, 다양성도 줄어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곤 있지만, 절대적인 면에서는 탈 아시아를 했다고 보긴 힘들다. 유통망으로서 넷플릭스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는 반면에, 이를 견제해야 할 국내 경쟁자의 힘은 빠지고 있다. 산업의 중요성에 비해서 국가의 지원은 없는 셈이다.

이에,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의 적용 대상에 ‘문화·콘텐츠’를 공식적으로 포함시켜,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전략산업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콘텐츠 산업에 합당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과거 우리가 반도체 산업에 그랬던 것처럼 과감한 세제 혜택과 전략적 금융 지원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이 그러했듯, 1980년대 반도체 육성 정책이 그러했듯, 이는 특정 산업을 위한 특혜가 아니라, ‘문화 안보’를 지키고 ‘경제 성장’의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여 대한민국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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