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Aug 12. 2022

나는 오징어 게임이 싫다

눈치만 보다가 이제서야!


이게 대체 무슨 뜻이람




나는 유행이 싫다.

나는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는 것이 싫다. (유튜브 자체를 보지도 않는다)

철 따라 화두 되는 한국 드라마가 싫다.(차라리 수입 영화가 덜 유치할 지경이다)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가 싫다.(파스텔톤 표지의 산간 책들은 딱 믿고 거른다)(하등 도움 안 되는 감성 문구들)

그렇다. 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싫다.


더 오래전으로 돌아가면 한국 콘텐츠가 싫어진 것은 <7번 방의 선물>부터다. 그다음은 <국제 시장>. 그런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돈을 내고 큰 스크린으로 본 기분은 가히 모멸스러웠다. 객석에 앉아 경악을 했다. 이 무슨 신파에 말도 안 되는 서사야.

성범죄자와 음주운전 엠씨가 진행하는 모든 예능, 교복을 줄인 학생들이 나오는 웹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시대엔 해로운 것이 너무 많다. 당연하다는 듯이, 필수적이라는 듯이 더러운 파도를 타고 넘실넘실 흘러들어온다. 나는 구멍 뚫린 보트를 타고 도망친다.

<오징어 게임>의 화제성은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입소문을 타는 것들은 대부분 나를 실망시키기 마련이다.(이미 입소문에서도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자극적이고 유해한 영상매체와 이목을 끄는 출연진.) (사실 이렇게나 속 보이는 마케팅을 하는 매체를 제대로 보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나는 이 조미료 같은 매운맛이 잔뜩 들어간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매체의 파급력만큼은 어마어마하다. 넷플릭스 전 세계권에서 뭔가를 했다던지, 평범한 세모 네모에 무슨 의미를 부여했다던지.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이상한 도형들을 그려놓고 '돈 필요하면 연락해요'라는 말을 하는 직장 동료의 유머를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안도한다. 이렇게 다 똑같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아직 조지 오웰의 에세이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 개탄스러운 현대 드라마의 시놉시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오징어 게임>이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장동료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드라마 얼마나 봤어요? 나는 아직 초반인데."


"나는 거의 다 봤죠. 그 짜증 나는 할아버지가 글쎄."


손님들끼리도 이야기하는 것을 하루에 대여섯 번은 듣는다.


"나 오늘부터 보기 시작했어."


​"나는 다 봤는데."


"야 너는 역시 빠르다."


나는 이 사람들의 성실함이 놀랍다. SNS가 던져주는 무언가를 바로 낚아채고 득달같이 관람하여 시대의 유행에 편승하는 사람들. 어떤 의무감이라도 있는 양 앞다투어 동일한 화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영화와 라디오를 걱정한 문구를 읽어보기는 했을까. 조지 오웰의 책이 있는데 어떻게 <오징어 게임>을 볼 수 있을까.


막무가내로 <오징어 게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돈을 따내기 위해 사람 목숨이 걸린(주로 가난과 빈곤이 화두로 등장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주제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빈자에 대한 편견과 관념만 부추길 것이다. 나는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제부터가 반항적이고 단편적이다.


직장동료가 이어폰 없이 보는 <오징어 게임>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드라마에서는 나이 있는 여인이 상대편에 소속하길 원하며 '무엇이든' 잘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패의 구성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그들은 펠라치오를 하는 흉내를 내며 지금 당장 기술을 보여달라는 식의 천박하고 더러운 언행을 한다. 영상을 보지 않았어도 기분이 언짢다. 전세계적으로 유행한다는 한국 드라마에서 저딴 연출이나 하고 있다니. 여성이 잘하는 '모든 것'은 결국 섹스와 연관되며, 여성은 제안하고 남성은 고른다. 유해하다. 끔찍하게 유해하고 여성 혐오적이다. 이 드라마 속 여성의 역할이 어떨지 눈에 훤하다. 강한 척 하지만 약해질 것이고, 누군가의 약점이 될 것이고, 여성을 앞세워 울게 될 것이다. 역겹다. 나는 나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와 예능을 보지 않는다. 구토가 나올 것 같다.


유행이 이렇게나 쉽고 간편하다니. 이 정도의 서사로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오징어 게임> 얘기를 하고 어떠한 상징 같은 것으로 자리를 잡다니.

요즘의 한국은 얄팍한 매체를 따라 급격하게 끓고 식고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가끔 영화였고, 드라마였고, 예능이었지만 이제는 유튜브로 인해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유튜브라는 매체가 온통 부정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영 탐탁지가 않다. 개인 개인의 섣부른 목소리에 너무 많은 관중들이 따라붙고 일종의 사회현상까지 지배하는 꼴이라니. 나는 여전히 유튜브보다는 종이 설명서나 팜플렛을 원하고 다들 보는 드라마보다는 50년 이상 된 고전 명작이 좋다. <나의 아저씨>도 <펜트하우스>도 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 건너 듣는 것 만으로 각이 나온다. 불쾌하고 소비적이다. 나는 한국 드라마를 기분 좋게 즐길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시대가 창조하는 대중매체는 대체로 해롭고 영양가가 없다고 느껴진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과 볼 가치도 없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높고 깊은 것을 바란다. 진하고 오래된 것을.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운동하며 영상을 틀어놓을 바에야 책을 읽겠다고 말했다. 나는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끼고 있을 바에야 리베카 솔닛의 책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사실 씁쓸하다.

점점 더 작은 화면에, 손바닥에 들어오는 화려하고 그럴듯한 영상에, 눈에 힘을 주고 공들여 읽지 않아도 귓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재미난 것들에 빠져드는 모습들이. 하나의 매체를 모두의 관심사로 만들어버리는 세뇌적인 현상이 한심하고 씁쓸한 것이다.


스티븐 킹이 티브이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대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안도했던 것을 생각한다.

아직도 유튜브를 보지 않는 내 고집이 좋고, <오징어 게임>을 보지 않은 나의 뇌가 좋다. 이러한 도태는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앞으로도 온갖 유행들을 무시한 채로 조지 오웰과 스티븐 킹의 허상과 함께 살 테다.


조지 오웰이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은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간다던 구절을 옮겨 적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행락지' 중



<오징어 게임>.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것들은 모두 이런 것들 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징어 게임>이 싫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