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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2. 2023

Washington 08. 좋아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니


설마 네가 진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지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고기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캘리포니아에서 친구가 왔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바에서 만난 인연이다. 모든 문장을 시를 짓듯 이야기하는 바론은 나에게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다. 워싱턴 디씨의 정반대에 살고 있는데도 얘기를 듣자마자 곧장 날아왔다. 미국 내에서도 비행기로 6시간, 두 시간의 시차가 있는 거리. 당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테오도르를 보러 온 여행에 바론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 몰랐지. 너한테 내가 뭐라고.


테오도르 없이 보내는 시간에 만날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바론과 있으면 혼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테오 생각이 났다. 테오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론이 오지 않았으면 이 시간에도 테오와 만났을 텐데. 웃기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바론의 미국식 농담 말고 테오의 녹색 눈동자와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앞에 있다면. 바론과 만나는 내내 죄책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에. 어떻게 날 보러 휴가까지 빼고 온 친구한테 이런 못된 생각이 들 수가 있지.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다니 사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그렇다면 그것도 참 무례한 감정이다. 아니, 아니지. 사랑이 아니라 내가 무례한 거지. 바론을 앞에 두고 테오와 저울질을 하는 내가 무례한 거지. 사랑의 이름이 점점 더러워진다. 나 같은 사람이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고집을 부려서 워싱턴 디씨까지 날아온 나는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바닥에 누워버리는 아이와 다를 게 없다. 생떼를 들어줄 보호자도 없고 억지를 부릴 나이도 지났는데 아직도 내 손에 없는 걸 탐내기만 한다. 사랑의 이름을 더럽히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목을 매는 건 어쩐지 유치하고 꼴사나워 보였다. ‘좋아하나?’ 정도까지는 괜찮으려나. 어쩐지 폭신폭신하고 두근거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으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 말이다. 그래 뭐, 나한테 관심 없나 보지. 하고 가던 길을 갈 수 있는 정도.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다. 이 강박은 내 성격이다. 아마 평생 고쳐지기는 힘들 것이다. 자꾸만 내가 아는 언어에 내가 아는 개념을 구겨 넣으려고 한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영화 속에서나 보던 사랑에 너와 내가 손을 잡고 등장하는 상상. 그렇게 인형놀이를 하다가 혼자 실망하고 혼자 기대에 부푼다. 이것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바론에게 워싱턴 디씨에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왔어. 대책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왔어. 걔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와 얘기하며 테오의 눈동자를 생각하는 나에게 바론이 말했다.

“이런 말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그 친구는 너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맞아, 그런 거 같아. 하고 맞장구를 치는 나.

“사람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성적이고 현명한 바론이 나와 테오의 사이를 단정 한다. 테오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아쉽지만 이번에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각오를 했는데도 입이 쓰다. 나의 멍청한 짓에 떨어지는 냉정한 평가.

아니야, 테오는 나를 좋아해. 좋아할 수도 있어. 좋아할지도 몰라, 하며 고집을 부리고 싶은데 이미 스스로가 알고 있다. 모든 건 다 내 착각이었다고. 테오도르 에디슨의 본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설레발을 친 거라고. 바론의 말에 납득도 하고 순응도 한다. 응, 역시 별거 없었던 거지. 멍청한 짓이었지만 이렇게 미국도 한번 와보고 나쁘지 않아, 그치. 사랑도 아니고 고집도 아닌데 체념은 차마 하지 못할 이 마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람의 머릿속은 이렇게 단순하고 바보 같아서 감정에도 하나하나 이름표를 붙여주느라 바쁘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안될 것 같대. 실연이라고 하기에는 속이 텅 비어있는 이 감정은 대체 뭐야?


이름을 바꿔다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설득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지 않은가.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것들에 막연한 시샘이 든다. 온 세상이 그저 잘못 지어지고 그르게 불리는 것들의 천지였으면 좋겠다. 차라리 이 모든 것에 아무 이름이 없었더라면. 그저 미처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가엾고 동정해야 할 감정이었으면.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랑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언어가 뭐라고 그깟 단어 하나에 초조하다가, 무덤덤하다가, 심장 떨리다가,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가.


웃기는 인생이다.

조금 더 안전하게 목을 매고 싶었지.

여기까지 날아올 때보다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지.

그래도 호텔에서 테오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지금 이보다 더 즐겁고 따뜻할 수가 없다. 멍청하긴 했지만 내가 한 일을 딱히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온전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 보러 가고자 하면 보러 갈 수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그를 보고 싶어 하면서. 바론과 같이 있으면서도 네 생각을 하면서. 사랑의 이름을 더럽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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