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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y 16. 2023

가슴의 구멍은 빗물받이 용

고추 띄운 물처럼 매콤하구나


뮤지엄 산 에서 본 세모꼴 하늘.




“작가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 구멍을 언어로 메운다.”


권혁웅 시인


*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더니 하얀 여백을 두고 허둥거리는 일만 늘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이사 가고 싶은 집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팀장님에게 골통에서 뎅뎅하는 종소리가 울릴 만큼 야단을 맞았고 처음으로 행사를 진행하게 돼서 예산을 맞추다가 스트레스를 받았다. 몸에 있는 피가 다 바글바글 끓는 것 같다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쪽 빠져나가는 것 같다가. 그때마다 글을 쓰면 이 기분이 좀 나아질까 궁금했지만 끝끝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최면 영상을 틀어놓고 억지로 잠을 잤다. 인생에 마가 끼었다고 구시렁거리면서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있었다.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중구난방으로 굴러가는 인생. 이 고소한 냄새가 잘 익은 냄새인지 새까맣게 탄내인지 둘러볼 시간도 없이 내일이 찾아오는 인생. 그래도 재미있다. 이제야 허둥지둥 일하는 느낌이 난다. 어쩐지 회사생활이 이상할 만큼 쉽다 했다. 이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는데.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새로운 곳에 뛰어든 대가는 고추 띄운 물처럼 매워야 제맛이지.


지금은 전세 대출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공기와 땅에서 여름냄새가 난다. 오랫동안 데워졌다가 식기를 반복하던 날씨가 이제 내내 후끈하기만 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한낮이다. 달리기를 안 한 지 오래됐으니 오늘 저녁에 한번 뛰어볼까 하지만 이 생각은 어제도 똑같이 했다. 아마 오늘도 뛰지 않겠지. 혹시 모른다. 이렇게 글을 써놓으면 신경 쓰여서라도 뛰게 될지도. 조깅을 그만둔 지 한 달이 넘었다. 한 시간 무리 없이 뛰던 체력은 모르는 새 어디까지 떨어졌을까. 덜컥 달리기가 겁이 난다.


집을 알아보면서 난생처음 대출 상담도 받고 신용조회도 했다. 어벙하게 어른의 세계에 뛰어든 느낌이다. 얼마나 할게 많고 귀찮은 것 투성이인지. 뒤늦게 은행 네다섯 군데를 돌면서 이러고 있는 게 철이 없는 건지 지금껏 속 편히 잘 산 건지 모르겠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대출에 문제만 없다면 다음 달에 나는 북한산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외 연수를 갔다 오고, 기회가 되면 15일 정도 미국지사로 보내달라고 떼도 부려볼 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칭찬받고 있으니, 내 브랜드의 세계시장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소비량 1위인 나라에서 뭐라도 배워오겠다면 보내주지 않을까. 그러면서 겸사겸사 그 녀석 얼굴도 보고 오고. 연차를 끌어 써서 닷새정도는 놀다 오고.


아무래도 나는 작가가 되기엔 글렀다. 내 구멍은 말로 채울 만큼 크지도 많지도 않다. 그저 물에 빠뜨리면 가장 먼저 동동 뜨는 뚫린 주둥이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시답잖은 것들만 늘어놓아도 신이 나서 떠들고 있으니. 몇 없는 구멍인데 딱히 언어로 땜질해 둬야 할 이유도 없다. 내 구멍은 환기구 정도로 사용 중이다. 가끔 거기로 바람도 들고 빗물도 들어서 바깥 날씨와 세상 동태 구경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에게 언어는 그냥 언어다. 심각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즐겁게 덩실덩실 살고만 싶다. 글이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글이라도 쓰면 좀 괜찮아지려나‘ 정도지 ‘당장 이걸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죽겠다’ 싶은 게 아니니까. 내가 쓰고 싶을 때 쓴다. 구멍은 구멍대로 내버려 두고, 오늘처럼 하늘과 땅에서 여름냄새가 날 때 그 향기를 기록하려고 쓴다. 멋 훗날의 내가 2023년의 여름은 5월 16일의 한낮에 찾아왔구나, 하고 되뇌도록. 내가 쓰는 언어는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적절할 때 쓰여지는 것, 배수구 뚜껑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것, 실없는 유쾌함을 조금이라도 담고 있을 것.


구멍은 빗물받이 용으로 그냥 내버려 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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