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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an 04. 2024

Bar-20. 아아, 행복한 야생 효모의 삶!

인간은 뭐, 죽든지 말든지.

이토록 아름다운지



효모는 산소가 없으면 발효를 하지만, 산소가 있으면 그냥 자란다. 알코올을 만들지 않을 뿐이다. 마치 우리가 호흡하듯이 효모도 호흡하면서 살아간다. 당연히 산소뿐만 아니라 영양분도 있어야 효모가 증식한다. 산소의 유무에 따라 알코올 발효 여부가 달라진다. 이른바 파스퇴르 효과다.


허원, <지적이고 과학적인 음주 탐구 생활> 중


*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볼을 복숭아색으로 물들인 20대 여성 네 분이 들어왔다. 술을 즐겨 마시지 않고, 맥주도 소주도 막걸리도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궁금해서 들어온 손님이다.

사랑스럽지만 가장 까다로운 부류다. 어떤 부분에 흥미를 가질지, 전문적인 내용을 어디까지 뭉뚱그려 말해야 할지를 가늠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삼십 분, 영상은 십삼 분. 영상 속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어지간히 위스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집중도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어수선하게 쳐다보는 손님들의 주변을 맴맴 돈다. 무엇을 주제로 잡아야 이 사람들의 삼십 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위스키에 입문한 사람들은 입문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면 소통하기 쉽다. 집에서 위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은 면세점 이야기를, 칵테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바 추천을 하면 공감대가 생긴다. 술을 잘 안 마시고, 그저 궁금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나는 궁금하다. 위스키 증류소 어디에서 좋은 향기를 폴폴 풍기는 소녀들이 행복해질 만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까.


별 재미도 없는 역사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는 것이 감사하다. 어렵기 짝이 없는 위스키의 원재료와 증류 과정도 처음처럼 흥미로운 눈빛으로 봐주고 있다. 보통은 영상을 빠르게 쳐버리고 질문시간을 길게 가지는 걸 선호하지만 이런 손님들에게는 위스키를 맛보기 전에 위스키와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영상을 중간에 멈추고, 느껴지는 향기를 물어보고, 농담을 던진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맥주, 버번, 쉐리의 이름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도 한다. 정말 술에 관심 없는 거 맞아요? 하고 물으면 봉숭아가 터지듯 와르르 웃는다. 길게, 길게 영상과 함께한다. 위스키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물과 보리,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시간이다. 다급하지 않게 충분히 주어지는 시간.


40도의 스트레이트 위스키를 처음 마셔보는 경험이니 당황할 법도 한데 다들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중간에 물도 몇 방울 떨어뜨려 다른 향도 맛봤다. 영상을 보는 동안 얌전했던 소녀들은 궁금증이 많았다. 병에 있는 깃발은 왜 그려져 있는 거지요? 증류소를 이전하기 전 원래 있던 곳은 어떻게 됐나요? 지금까지 마셔본 위스키 중 뭐가 가장 맛있었나요? 위스키는 어떤 안주가 잘 어울릴까요?

그리고 어김없이, 와인이 나온다.


와인은 따자 마자 바로 마셔야 하는데, 위스키는 어떤가요?


좋은 질문이다. 와인은 포도로 만든다. 당도 있는 포도를 물에 불리고 밀폐된 곳에 방치하면 공기 중에 떠다니는 효모가 달라붙어 당분을 분해하고 알코올을 뱉는다. 이게 발효주의 원리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는 짓 하나 없이 야생에서 혼자서들 뚝딱뚝딱 도수 14도의 알코올을 만들까. 아직까지도 공부하고 있지만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와인은 기본적으로 발효주를 증류기에 넣고 고도수의 알코올을 뽑아낸 증류주보다 훨씬 자연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코르크를 열고 공기와 접촉을 하는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된다. 말인즉 부패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세균이 들어가고, 종내에는 산패되어 버리는 결말을 맞는다. 증류주의 유통기한이 기약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40도의 도수에서는 세균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알코올로 상처를 세척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하지만 할 때마다 즐겁다. 경이롭지 않은가? 이 모든 작용들이.


효모는 지금 내가 누워있는 호텔방 침에 언저리에도 떠다니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귓가에도 서성거린다. 우리의 눈으로는 알 수 없다. 그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우리가 밥을 먹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화장실에 내려가 변을 보듯이, 효모도 당분을 맛있게 먹으면 알코올을 싸낸다. 차이는 변기물을 내리는 우리와 다르게 효모들은 자기가 배설한 알코올 사이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사탕정원처럼 풍부한 당분에서 행복하게 포식한 효모들은 알코올을 펑펑 싸내다가 14도의 도수에서 질식사한다. 술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산소가 있고, 효모가 있고, 효모가 좋아하는 당분이 있기에 일어나는 일. 이것이 효모의 삶이다. 우리가 호흡하듯이 효모도 호흡하면서 살아간다. 당연히 영양분도 필요하고 산소도 필요하다. 배설물에 끼여 죽지만 맛있는 걸 (말 그대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니 썩 나쁜 죽음은 아니다. 어쩐지 의도치 않게 세상의 주정뱅이들에게 이바지하는 죽음. 효모도 살아있다. 미생물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많은 것을 변화하게 한다.


수업을 듣고 간 소녀들이 올린 후기에는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말이 적혀있다.


저희가 여행에서 얻은 추억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문장 끝에 찍혀있는 네잎클로버.


마치 효모가 호흡하듯이 나도 살아있다. 가뭄에 콩줄기 같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단맛을 곱씹으며 알코올을 마신다. 경이롭지 않은가? 사슬처럼 얽혀있는 인간과 효모의 관계가. 효모들은 나 때문에 죽고, 나는 효모 덕에 산다. 이것이 효모의 삶이다. 인간의 삶은, 글쎄. 별로 관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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