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May 15. 2024

독립운동도 못하는데

이럴 거면 왜 사니?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잘 곳이 없으면 길바닥에서 자면 되는 게야. 비 안 오시면 하늘은 천장이지. (후략)”


박경리, <토지 5> 중



*

비 예보가 있어서 창문을 닫았다.

얼마 전 비소식을 듣고도 그냥 잤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 흠뻑 젖은 집안을 보고 얻은 교훈이다. 혼자 사는 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내가 뒤처리를 해야 한다. 다 나의 잘못이다. 부주의한 것, 불성실한 것, 게으른 것, 모두 다.


하늘 향해 나있는 창 아래가 잠자리라 비가 내리면 기분 좋게 잠에서 깬다. 경쾌하게 콩을 볶는 듯한 소리, 잔잔하게 팝콘이 튀겨지는 듯한 소리. 낯짝을 태워버릴 것처럼 내리쬐는 햇빛도 없이 어둑어둑한 회색 하늘에 빗소리만 들린다. 천장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음이 꽤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는 걸 이 집에 살면서 알았다. 내일은 비가 온다. 오후 열두 시면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니 비와 함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창문도 다 닫아두었으니 걱정도 없다. 비구름이여, 오라. 뭉게뭉게 일주일을 다 휘감도록 두텁게 오라.


부모와 절연하고 올라오는 길에 천리포 수목원에서 캔 안에 키우는 식물모종을 샀다. 내가 산 건 무순이다. 설명서가 없어서 허둥지둥하다가 물 용량을 한참 초과해서 부었다. 별생각 없이 볕 드는 창가에 올려놨는데 문 닫는걸 깜박하고 드센 봄비를 맞아서 홍수 꼴이 되었던 게 며칠 전의 일이다. 흙이 젖고 씨앗이 썩어 그른 줄 알았건만 따먹기 아까울 만큼 싱그럽게 자랐다. 이대로 잘 두었다가 뒤꼍 산턱에 묻어줄까 보다. 한낱 인간의 목구멍에 넘어가기 아까운 생명력. 양달을 향해 손을 뻗는 싱싱함.


무순은 밭에서도 산에서도 잘 자랄 것이다. 나에게 먹히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도 무순의 운명이다. 맥주 캔 안에서도 산책로 뒤편에서도 가만히 살아가고 있는 무순이 부럽다. 인간도 에어컨 보일러 전자레인지 없이 하늘을 천장 삼아 살아가면 좋을 텐데. 전국 방방 곳곳을 기차 없이 쏘다니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보퉁이에 들어있는 주먹밥 두어 개로도 든든한 삶. 품이 들지 않아 가볍고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 대하소설을 읽고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다. 독립운동을 할 바에야 그냥 확 죽어버리지,라는 생각이다. 나는 비 안 오는 하늘 아래 누워 비 내리는 내일만 걱정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날 좋을 때 죽어버리지,라는 그런.


길상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재작년 6월 보훈의 달 후덥지근한 여름날에 서대문 형무소에 놀러 간 기억이 생생하다. 모든 걸 익혀버릴 듯 찌는 날씨에도 형무소 안은 차가웠다. 한 점의 바람도 들지 않는데 쇠가 부딪히는 것처럼 스산했다. 독립운동을 할 바에야 그냥 확 죽어버리지.

길상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박우규 의사도 사형당했다. 독립운동 따위에 목숨을 바칠 바에야 그냥 죽어버리지, 하면서 나는 운다. 이 시대는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도, 무리도, 의지도, 정열도 남아있지 않은 공허함 뿐이다. 이제 어디로부터 독립해야 하는지도 겨냥하기 어려워, 그냥 휩쓸려가고만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뭘 믿어야 하는 건지, 어디서부터 도망쳐야 하는 건지도 종 잡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냥 진즉 죽어버릴걸.

독립운동도 못하고 살 바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