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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y 05. 2021

종말은 아름답게 찾아온다

변태들의 역작,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영화 <신세기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나는 만화로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스물다섯에 처음 본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역시나 나에게 여러모로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시리즈의 피날레, 꽃이자 절정인 <신세기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려고 한다.

작가의 의도와 원작 정체성에 대한 것은 아는 바가 없으며, 순전히 개인이 보고 느낀 생각이라는 것을 말해둔다.








영화에는 전반적으로 사람, 인류, 인간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역시 최후의 적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로군.”

“상대는 사도가 아닌데.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인간.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그에 대응하며 사격하는 것들의 완벽한 융합이 에바의 신인류 프로젝트다.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지구의 인간들을 녹이고 섞어 이상적인 유기체로 재탄생시키는 것. 인간의 형체조차 버리면서 ‘완전한’ ‘하나의’ 생물을 만드는 것. 그것이 더 높은 경지인 것처럼, 마땅히 인류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라고 믿는 이들이 기득권이자 최고 권력층이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변질을 도약이라 믿으며 ‘그대들에게도 죽음을 선사하겠다’는 태도가 아연하기만 하다. 종말을 결정한 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겸허히 죽음을 맞고 종말을 모르는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삶을 빼앗긴다.






카츠라기 미사토(29), 네르프(NERV) 사령부 대령



아니나 다를까.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다. 너무나 커다란 힘에 떠밀려 착실하게 멸종을 향해 가면서도 그 속도를 늦추려는 사람. 희망과 미래를 보는 사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인간으로써의 삶이 눈물 나도록 절실한 사람. 모든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누구보다도 어른이자 성인의 역할을 맡고 있는, 카츠라기 미사토 대령이다.

그녀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기 전에 자신이고 동료이고 아이들이다. 대의보다 눈앞에 것들에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하는 사람. 누구보다도 많이 흔들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혼자 있을 때는 지구 속까지 내려앉는 사람. 카츠라기 미사토라는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간이 조종하는 에반게리온의 파일럿들은 모두 사춘기가 갓 시작된 아이들이기에 그녀의 책임은 유달리 각별하다. 열네 살, 중학교 1학년의 소년소녀 병사와 스물아홉에 대령직을 단 미사토. 다그침도, 회유도, 칭찬도 직속상관인 그녀의 몫이다. 24미터의 거대 로봇을 몰고 다니는 파일럿이라 하더라도 미사토에게는 언제까지나 지키고 보호해야 할,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은 아이들일 뿐인 것을.

이런 긴박한 상황에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전담 파일럿, 이카리 신지가 골치를 썩인다.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정신이 세계의 멸망이 코 앞에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와장창 무너지고 만 것이다.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 당장 살 이유가 없다며 총알 밭을 뚫고 신지를 찾아온 미사토에게 죽고 싶다는 말이나 하고 앉았다. 미사토가 그렇게나 아끼던, 유독 눈에 밟히고 안쓰러웠던 열네 살의 소년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녹아내렸다. 인류 재생의 계획은 시작되기도 전인데 이미 형체를 잃은 것처럼. 시체인 것처럼. 미사토는 신지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친다. 예의 그 당찬 목소리로. 또랑또랑하고 맑은, 흔들린 적 없을 것 같은 목소리로.


“너 아직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제대로 살아서, 그다음에 죽어버리라고.”


제대로 산다는 건 뭘까. 어른이 되는 건 뭘까. 신지가 이 곳에서 죽지 않으면 그가 짧은 인생 동안 겪었던 불행과 고통들을 다 물릴 수 있을 만큼 행복해질까. 신지는 모르지만 미사토는 알고 있는 사실. 그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고 싶은 소년이 살아서, 아직 살아서 세상 위에 남아 있는 것. 그건 때로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소류 아스카 랑스레이(14), 에반게리온 2호기 파일럿



이 즈음 또 다른 파일럿 중 두 번째 병사, 아스카 소류 랑그레이는 일생일대의 전투를 앞두고 있다. 자기 인정 욕구가 누구보다 강한 아스카는 영화가 시작되지도 전에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회복 불가능한 내상을 입은 탓이다. 조숙하고 명석한 아이. 져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지고 싶지 않았던 아이. 늘 그렇듯 주인공의 뒤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망가져 버린 아이. 아스카를 지키려는 미사토의 조치로 자신이 조종하던 에바의 동체에 넣어져 본부 앞 호수 바닥에 잠들어 있지만 정신은 날이 서 있다. 문자 그대로 물 밑에 잠겨서 적이 던지는 포탄을 맞으며 아스카는 생각한다. 적에게 패배한 기분을. 그 치욕과, 분노와, 슬픔과, 모멸을.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었음을. 아무리 갈구해도 타인의 관심은 개인이라는 벽 앞에 막혀버린다는 것을. 죽음과 같은 혼란을 겪으며 아스카는 중얼거린다.


죽는 건 싫어, 죽는 건 싫어, 죽어버리는 건 싫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존재의 이유를 찾던 아스카가 진심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삶에 대한 욕심을 낸 순간 그녀의 에반게리온은 각성한다. 파일럿과 정신적으로 감각적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거대 로봇은 사람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한 부대 전체를 전멸시킬 정도의 에너지를 낸다. 열네 살 소녀와 하나하나 교감하고 있는 거대 생체병기. 그녀가 전투기와 함대를 부수는 장면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고대의 괴물 같기도 하고, 초월적인 다른 세상의 무언가 같기도 하다. 이 모든 학살에서 그녀와 그녀가 타고 있는 에반게리온을 지킨 것은 ‘AT필드’라는 방어막이다. 에반게리온의 선체가 공격을 받으면 반투명의 형체로 물리적이면서도 특질적인 막이 형성되는데, 방어력이 매우 뛰어나서 전투 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AT필드는 자기 보호 본능, 자존감과 직결하는 자기애, 확신, 자부심을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살 것이다’라는 아스카의 사고가 만들어낸 방어막은 어쩌면 의아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리고 곧바로, 아스카의 에반게리온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조각조각 공격당한다. 뜯어 먹히고, 파헤쳐지고,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이 터져 나온다. 에반게리온은 파일럿과 하나의 신경계를 공유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이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아스카가 겪었을 고통은 인간이 산 채로 겪을 수 있는 한계였을 것이다.

아스카가 타고 있는 에반게리온 2호기의 처참한 꼴을 본 신지는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을 지른다. 세계 따윈 관심 없는 열네 살, 이보다 더 참혹할 수가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순간 외부의 무언가로 인해 깨부숴진다. 그리고 혼돈을 겪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래도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겪으며 받아들인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이고, 사회이고, 죽지 않으면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인간이라서 선택할 수 있는 선이며 진리이자 생명의 방식이라는 것을.

신이 아니라면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알고 나서야 느껴지는 것이다. 느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기 위한 세계의 멸망이었다. 자신이 너무나 싫은 한 아이에게 너도 너만의 세상이 았다는 것을, 그것을 소중히 하고 가꿔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세계의 멸망. 무서울만치 아름답고 극적인, 기괴하고 자비 없는 재앙 그 자체.






이카리 신지 (14), 에반게리온 초호기 파일럿


내가 여기에 있어도 괜찮아?


대답은 (무언)이다.



진정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의 성취에서 행복하게 무너지는 것. 그런 종말.

도망치고 싶었던 죽음이 일생을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존경하고 흠모했던 사람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은 죽음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 소중한 것 하나는 있었던 사람이 미소 지으며 죽을 수 있다. 그렇게 형체를 잃은 사람들이 찰랑찰랑 고여서 바다가 된 세상. 일전에는 인간이었던, 오렌지색의 액체가 지구를 잠기게 할 것처럼 차오른다. 모두 인간이다. 타인과 자신의 경계가 없는, 개인이라는 이미지조차 완전히 차단당한 채로 ‘인류’라는 생물종에 뭉뚱그려진 인간과 같은 성분의 물.






"행복해질 기회는 어디에든 있어."



이때의 작화는 실로 환상적이다. 에반게리온 하면 거대 로봇의 둔탁한 타격감이 느껴지는 동세와 버블시대의 정석과도 같은 세밀한 묘사가 도드라지는데 세계의 멸망을 그린 이 장면만큼 아름다운 것은 내 기준에서 또 찾기 힘들다. 시공을 아우르는 범우주적 연출을 작은 화면에서도 까마득히 빠져들도록 만들어 놓았다. 의식의 제물들이 달고 있는 오르가즘에 달한 소녀의 얼굴은 기괴함 그 자체다. 하늘 사방에 못 박힌 메시아와 원시 지구를 떠오르게 하는 벌건 바다. 생명의 멸종은 이만큼 균형적이지도, 얼빠질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을 테지만 영상 속에 구현된 세계의 종말은 내 안의 어떤 쾌락점을 톡톡 건드린다. 흐리멍덩하게 굴러가던 세상이 그 누구의 손에서도 구해지지 못했다는 점이! 심지어 그렇게 멸망한 세상이 너무나 선명하게 화려하다는 것이.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미성년의 아이들을 다루며 끊임없이 섹스에 대한 메타포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때로는 간접적이었고, 가끔은 눈 앞에 들이대기도 하며 아이가 겪어보지 못한 ‘어른들만의 무언가’에 대한 동경처럼 다루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의 끝에서, 열네 살의 소년병은 섹스를 경험한다. 이것조차 은유적으로, 야릇하지도 허둥거리지도 않는 행위 그 자체로 그려졌다.

섹스는 네가 바라는 그런 게 아니다. 나의 쾌감은 나의 쾌감, 너의 쾌감은 너의 쾌감일 뿐. 섹스로 하나가 된다는 생각은 어린아이의 로망이다. 해보면 아무것도 다를 것 없다. 몰랐던 것을 하나 더 해보는 것, 그게 다다.

그리고 세계의 종말을 위해 쓰인 도구, 에반게리온에 타고 있던 신지와 아스카는 인간의 형상으로 모래밭에 떨궈진다. 우주 같은 하늘에 오렌지색이다 못해 시뻘건 바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액체가 파도치는 그런 바다에 도태된 인류로 버려졌다.


이 영화에는 신지가 조종하는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신지의 어머니 이카리 유이와 동화되어 거의 동일인물과도 같다는 설정이 있는데,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다. 죽고 싶어 하는 아들을 몸속에 태우고 그를 더 죽고 싶게 만드는 행위를 강제당하는 모성이라니. 로봇 형상의 괴물 안에서도 신지에게 살아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있다고 말하는 유이의 대사는 부성이 사라지다 못해 버썩 마른 신지의 아버지, 이카리 겐도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다.

사실 어쩌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생각을 엄마에게 말하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신지의 말 그대로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몇 번이고, 언제까지도 물어도 그것은 그저 일어나야 했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태어나면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그것이 자식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들어야 하는 것은 부모인 것이다. 그래서 유이는 삶으로 돌아가게 될 신지에게 이 말을 남긴다.


“살아가려고 생각하면 어디든 천국이 된단다. 왜냐하면, 살아가고 있으니까. 행복해질 기회는 어디에든 있어. 태양과 달과 지구가 있는 한.”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거야. 왜냐하면 누구도 낳아본 적 없기 때문에.






왜이리 구원은, 이다지도 아름답게 빚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구슬프게 퇴장하냔 말이야.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려고' 봐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벌써 열댓 번도 넘게 보았지만 지금처럼 목적성을 가지고 등장인물의 대사와 작화를 눈여겨본 적은 없단 얘기다. 늘 그렇지만 작정을 하고 보면 영화는 달리 보인다. 어쩌면 이 여성비하적이고 남성향 판타지에 찌든 이 작품이 결국 사춘기의 로망과 감성을 지나 사회의 풍파에 찌들고 찌들게 될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마지막이 멸망해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어떻게든 살아나가야하는 주인공이라는 것 까지.

내용 설명을 아무리 친절하게 하려고 해도 불친절한 영화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멋대로 지껄여보았다. 직접 영화를 보게 되면 더 말문이 막힌다.

'신세기'의 배경이 2015년인 만화다. 구시대적 사상 그 자체라 봐주기 힘든 대사와 구린내 나는 장면들도 더러 나오지만 나는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 무엇보다 멋들어진 멸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색감과 질감과 뇌 피질 가득 고여있는 염세적 사상이 당신의 취향을 사정없이 치고 지나갈 수도 있다.(나처럼!) 마음이 건강함 사람이 본다면 영혼이 바삭해지겠만 전 인류 깊은 곳에 상주하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을 외로움을 부지깽이를 들고 들쑤셔 대는 그런 영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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